여름휴가는 초등학교 이후로 가본 적이 없다. 아빠가 여름에 유독 일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여름휴가'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 아예 없었다. 그래서 학창시절부터 여름에 시골 할머니 집에 다녀왔다느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왔다느니,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말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다. 하지만 20살이 지나고 나는 유독 더위를 타는 체질임을 알았고 쐐기를 박듯 여름휴가라는 단어를 내 삶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랬던 내가 8월 1일부터 3일에, 그것도 여름휴가 극 성수기에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다.
'성수기'라는 단어는 참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여름휴가도 안 가고, 추석 연휴를 껴서 어딘가 가는 사람도 아니기에 뉴스에서 쫑알거리는 '성수기'라는 단어가 참 신기했다. '그래, 나도 올여름엔 성수기에 휴가 가는 사람이구먼!'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들끓는 패기를 갖고, 사람 반, 물 반이라는 말을 뒤로한 채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나는 휴가를 가게 되었다.
제주도는 무척 더웠다. 폭염 주의보라나. 사실 여름은 어딜 가든 덥다. 하지만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몰려오는 그 비릿한 물 냄새가 너무 좋았다. 너무 습해서 발이 닿는 곳마다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지만, 눈썹까지 내려온 앞머리가 곱슬곱슬하게 말려 올라가는 게 짜증이 났지만, 제주도라는 섬이 주는 느낌이 아주 특별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향하는데 '아, 내가 제주도는 18살 수학여행 이후 처음 오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나는 제주도에 14년 만에 온 셈이다.
누구는 제주살이를 꿈꾼다고 할 때,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서울 땅에서 제주도를 떠올릴 때 '차가 없으면 이동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즉, 뚜벅이에겐 최악의 곳이라는 생각이 온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도 그랬듯, 여름휴가 어디 가냐는 말에 제주도라고 대답하면 '누가 운전해?' '차는 렌트하기로 했어?'라는 질문들이 우르르 나왔고 '아뇨.'라고 답하는 순간 측은한 눈빛들이 돌아오는 게 불쾌했다. 나도 현실을 잘 알고 있는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고생길 뻔한 숲속에 발 벗고 들어간다는 표정들.
'차 없이 제주도 여행 불가'라는 콧대 높은 명성을 익히 들어서 그런지 어딜 가려고 해도 어플에 나오는 2시간 30분이라는 숫자가 경악스럽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돈을 아낄 거냐, 아니면 택시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아낄 건지 기로에 서 있었고, 나는 주저 없이 '시간을 아끼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섬에 고작 2박 3일있는데 돈을 아끼느라 그 소중한 시간을 길에서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버스도 한 두어 번 탔다. 로컬 버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으나 부산, 포항, 김제, 강릉, 전주 등 다수 지역을 다녔던 나에게, 결론적으로 로컬 버스는 서울버스랑 비슷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폭염특보라는 빨간 경보가 내리치던 이튿날, 앱을 통해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 아저씨는 익숙한 듯 해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더 익숙한 듯 뒷좌석을 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제주도 와서 어디 어디 가봤어요?"
"원래 동쪽으로 가서 아쿠아리움 가려 했거든요.. 근데 너무 멀어서 안 가려고요."
"동쪽? 아니 서쪽도 좋은 곳 많아. 그런데 오늘은 너무 더워서 못 갈 거 같네. 거긴 다 야외거든."
"네, 저는 야외 싫어요. 맛집을 추천해 주세요."
"내가 제주 주민만 아는 맛집을 소개해 줄게!"
제주 주민만 아는 맛집을 소개해준다던 기사 아저씨는 정말 품목별로 식당을 소개해줬다. 해물라면은 어디, 고기 국수는 어디, 칼국수는 어디 등... 더불어 그는 미디어에도 노출된 전직 호텔 요리사였음을 고백했는데, 그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에 한층 신뢰가 갔다. 이런저런 대화 후, 버스를 타면 2시간을 족히 걸릴 거리를 30분 만에 갔다는 희열을 남몰래 느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안 그래도 어디서 뭘 먹어야 할지, 홍보용 블로그인지 아닌지 모를 정보를 믿어야 할지 난감했던 내게 아저씨의 맛집 리스트는 굉장히 소중한 정보였다.
점심 무렵에 그나마 아저씨의 맛집 리스트 중, 가장 거리가 가까운 고기 국수 집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제주도 택시 아저씨들은 그 집을 모두 아는지 이름만 말했음에도 내비게이션 없이 알아서 잘 찾아가셨다. 아저씨는 '먹는 방법'도 알려주셨는데, 그 비법은 '수육과 간은 식전에 적당히 먹고 고기 국수에 김을 너무 많이 넣어서 먹지 말아라'였다. 나는 마치 요리왕 비룡이 스승님의 비법을 따르는 것처럼 뭔가에 홀린 듯 비법을 생각하며 그대로 먹었고 그 결과 대만족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호테우 해변에 가면서 택시를 한 번 더 탔다. 내가 도민인 줄 알았는지, '아니, 관광객이에요?'라고 화들짝 놀라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본인이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내가 가려는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셨는데 알코올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 맛이 안 났다는 tmi식 정보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가 생각보다 넓다는 푸념 섞인 나의 말을 듣고 흔쾌히 지도를 주신 친절함도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 기사님들은 서울 기사님들보다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자연이 주는 위안 때문일까?
이번 제주도는 택시 기사님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나에게 맛집 리스트를 읊으며 잘 적고 있냐고 물어봤던 기사님은 이름까지 적어두었다. 일본, 중국 등 다수의 국가에서 유학을 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화려한 젊은 시절이 상상됐다. 전날 밤 술에 취해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는 기사님은 제주도의 자연을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이호테우 해변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도 좋았다. 글에는 없지만 곽지 해수욕장에서 돌아오는 길 만난 기사님이 '스타벅스에 들렸다가 갈까..'라고 중얼거리는 뒷모습을 봤을 때도 마음이 갑자기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다 각자의 삶이 있다. 나는 택시 안에서 각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엿본 거 같아서, 그리고 모두가 매일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