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나마나

ㄱ한다

by 고로케

2018년 1월, 어릴 때 살던 동네 근처로 다시 이사를 왔다.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이지만 초, 중, 고등학교를 보낸 근처로 오니 기분이 남달랐다. 사실 평소 다니던 병원이나 교회가 옛날 집 주변에 몰려 있어서 아주 색다른 감회에 젖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사 초반 남다른 기분이 들어 아주 잠깐 생소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생소'라는 손님은 아주 최근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익숙한 길거리를 다니며 추억을 곱씹는 사람은 드물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곧 정든 동네를 떠나야 하거나, 아니면 아주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져서 추억을 되짚거나, 여하튼 뭐라도 이별을 앞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그런 적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하고 싶다. 최근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00마을' 아파트 단지에 왠지 시선이 갔다. 그리고 내 두 눈을 통해 들어온 익숙한 풍경들은 뇌 속에 잠자던 추억 세포를 하나씩 건들기 시작했다.


중학 시절 소위 뺑뺑이 배정으로 인해 집 앞 학교를 두고 도보 약 40분 정도의 여중에 배치받았을 때였다. 나는 3년을 걸어 다녔는데 아주 더운 날에는 옆 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하드를 손에 쥐고 '00마을' 아파트에 있는 그늘에 앉아 쉬곤 했었다. 우리 동네는 예전에 공군 비행장이 있던 곳이라 아파트 건설 시 높이에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가장 높은 최상층이 6층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하늘이 탁 트이고 나무가 많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중 3 때는 우리 집 뒷산에 모여 '소년탐정 김전일'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어떤 수업 시간의 수행평가 때문에 연극을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밤에 뒷산에 모여 (나름) 영화 촬영을 했고 나는 감독이자 연출자였던 기억이 난다. 전일이 역을 맡았던 친구는 아직도 내가 비디오 원본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지 제발 비디오를 버려달라고 애원한다. 비디오는 이사 올 때 진즉 모두 버렸지만 왠지 비밀로 하고 싶다.


그냥 그랬다. 말로 하자면 끝도 없을 추억 팔이가 내 머릿속에 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즘 내 삶이 회색 지대처럼, 색을 잃은 것 마냥 재 가루처럼 시들시들했는데 모처럼 눈앞에 물감이 뿌려졌다. 나는 사람을 주로 나무에 비유하는데 당시 나는 정말 푸릇푸릇 한 새싹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열매를 맺지 않은 아주 건강한 나무일 텐데 뭐가 나 자신을 좀먹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신촌 밤거리를 걷거나 아침 거리를 걷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다. 10년이 지나면 10년 전의 고로케가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열심히 삶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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