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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을 먹은 쥐 Jun 24. 2021

수(手)비학

'손가락 모양'포스터로 징계받은 디자이너에 대해

... 계산대의 길이는 149센티미터, 다시 말하면 지구와 태양 간 거리의 천억 분의 일이 됩니다. 뒤쪽의 높이는 176센티미터, 그걸 유리창 너비인 56센티로 나누면 3.14가 나옵니다...
- Agliè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오컬트의 일종인데,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사이에서 또 의미를 찾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숫자라는 게 원래 멋지지 않습니까? 완벽한가 하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게 튀어나오고, 모든 걸 정복했다고 생각하면 미치광이가 그 모든 것만큼 튀어나오기도 하지요. 일찍이 수학귀신이 미치광이 숫자에 대해 경고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화내고 싶은 만큼 보인다

숫자에 대해 말하려던 건 아니었고, 다른 수(手), 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이 언제 읽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대기업에서 공개한 포스터에서 손가락 모양(과 글자의 조합, 각종 기호)에 대해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고, 업체는 포스터를 몇 차례 수정하고 사과문을 게시했으며 관련자를 징계하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포스터에 문제를 제기한 그룹에서 보는 디자이너는 '혐오'를 조장하며 기업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결사입니다. 더 큰일을 내기 전에 벌을 주고 손을 떼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아마도 젖병을 더럽히고 특유의 손가락 모양으로 인증하는 일베회원이나, 인종 혐오발언을 하면서 나치 팔 동작을 하는 자와 같은 선상에 두고,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인사이동이나 '어떠한 징계'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불만 가득한 댓글도 보입니다. 


같은 것과 다른 것

많은 논란에서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같다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연스럽게는 만들 수 없는 손동작과, 쉽게 반례를 찾을 수 있어 주장하는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손동작을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혐오나 공격의 의도가 분명하고, 그것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과,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 그 집단에서 말하는 주장이 무엇인지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의 공통점을 보고 모두 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아닌, 밈으로부터 나온 주장과 음모론에 의해 디자인이 판결되는 것은 부당합니다. 밈으로 판단하면 잘 익힌 대게가 욱일기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사안에 대해 결론을 너무 빠르게, 혹은 이미 내어놓고 얘기합니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요소는 신중하게 고민해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선택하든 문제가 없는 부분에서는 적당히 느낌에 따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업계의 한 디자이너'가  '의도적이고 고의성이 다분한 디자인'이라는 결론을 주장을 인용하였습니다. 아뇨, 그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고, 그렇게 주장하게 되면 당신의 작업물이 나쁜 의도로 해석되었을 때 해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논란의 맞고 틀림보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디자이너에게 불이익이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답답해서 필요 이상으로 글머리가 커지기는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는 작업물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렇게 부당한 이유로 작업물이 비난받았을 때 디자이너가 불필요한 수정을 하거나 징계를 받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이미지 노동자 심판관

내 법정에서 무죄를 논하지 말라. 무죄를 논하는 행위는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죄이므로, 유죄다.
- Fyodor Karamazov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은 부당하게 악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단 심문관들은 완벽히 '깨끗한' 소스를 가지고 '규칙'에 맞게 작업하더라도 불순한 느낌을 찾아낼 것입니다. 이들의 기준은 모호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기준이 모호할수록 해석자의 힘이 강해집니다. 이들의 의견에 응대해 주는 것은 지금도, 미래에도 해롭습니다. 이러다가는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Lawgiver를 겨눌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지에 대한 판단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 아동 성상품화 논란이 있었던 아이스크림 광고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적인 코드가 명백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광고는 분명히 아동의 성적 대상화를 강화하고 이러한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해악을 끼칩니다. 이런 경우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작업물은 사회 안에서 사용되므로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평가와 함께 사회적 맥락도 고려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결과물은 사안별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방향이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 자체로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해야 하며, 신뢰성 있게 의견을 제시하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악의적인 이미지 해석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나쁜 작업물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디자이너 조합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 눈물을 마시는 새 서문


디자이너들은 파편화되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현재도 많은 그룹이 만들어져 있고 제가 게을러 알지 못한 사회적 활동과 작업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적 활동이 있다면, 이번과 같은 사건에서 존재를 알게 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디자이너의 힘과 책임을 말하던 시절은 언제였던 걸까요? 언제부터 디자이너들은 넘쳐나는 제품과 금방 쓰고 버려질 이미지를 클라이언트, 상사에게 이리저리 휘둘려가며 만들고 있는 걸까요? 이제는 이상하게 받아들여질까 눈치도 봐가면서 작업해야 하는 걸까요? 언젠가는 컴퍼스와 자로 작도할 수 있는 도형만 사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번과 같은 사건에서 비난의 부당함을 설득하고, 디자이너를 희생양으로 만든 기업에게 비판 성명을 낼 수 있는 디자이너 단체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에 나오는 이미지의 경향을 분석하고 해로운 관습을 줄일 수 있도록 영향을 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만들면 좋겠네요.


쉽지는 않겠지만, 디자이너가 마셔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디자이너들의 눈물은 누가 마셔주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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