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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을 먹은 쥐 Jun 17. 2021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대장장이가 되어 배운 것: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없다는 생각

몇 년 전 퇴사를 하고 2년을 놀았는데, 그중 1년은 대장장이 일을 배웠었습니다. (퇴사 생활은 위장 상태로 잔고를 알아내는 능력-신경성 위장병-을 남기고 끝나긴 했지만 덕분에 얻은 퇴사 자격증으로 브런치 작가도 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망한 퇴사 이야기는 언젠가 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장인분들을 모셔다 놓고 1년간 전통공예를 배우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저는 '장석'이라고 부르는 전통가구 부속이나 장식을 만드는 것과 '야장'이라고 부르는 철을 불에 달궈 물건을 만드는-무기점 아저씨가 하는 일-두 가지를 가르쳐 주는 반에 있었습니다. 1년에 2가지였으니, 수습 대장장이 수준으로 배우고 끝나긴 했겠지만, 도구와 장소만 갖춰놓으면 간단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면서 신나게 놀 수 있을 정도는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가 와도 실업 걱정이 없다는 건 덤이지요. 디자이너가 멸망한 세계에서 뭘 하겠습니까?


대장간에서 철을 두드려 보는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뜨거운 불과 달궈져 빛나는 철, 식기 전에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작업 모두 멋지지만 쓰고 있는 작업도구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환풍기나 모루는 만들기 어렵긴 하겠지만, 손에 들고 있는 망치, 집게 모두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인크래프트를 시작할 때 도구를 늘려나가는 재미랑도 비슷하죠. 


잘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망치 자루가 부러졌다면, 적당한 굵기의 나무를 끼우고 만들어 뒀던 못을 쐐기로 끼워 넣으면 됩니다. 쓰던 집게가 납작한 도구를 만들기에  불편하면 납작한 집게를 만들면 되지요. 어디선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자급자족 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성취감을 가져다 줍니다.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의 것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들이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요. (물론 직접 만들어보니 더 대단하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장인의 영역이나, 대량생산이 가능한 현대문명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철기시대-아니면 산업혁명 이전-의 몸으로 회귀한 자에게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정신이 깃듭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나라도 법도 이름도 없던 시절이 있었고 어쩌다 만들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져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 아닐까요?


더 나아가 이런 생각이 혐오와 차별을 줄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혐오는 원초적인 감정이고, 차별을 하는 자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난받을 행동이라고 여기 않게 되는 게 아닐까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없다고 여긴 뒤에 다시 판단하는 과정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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