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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상자 Nov 01. 2020

베지밀 말고 우유

아빠는 회사 생활을 정리한 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베지밀 대리점을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가 일을 나간 동안, 나와 오빠를 어느 아주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내가 점점 살이 빠져서 이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엄지손톱이 없더란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울지 않아서 분유를 주지 않았다고 했다는데, 시간 맞춰서 수유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걸까. 조그만 아가가 얼마나 배고팠을까. 난 정말 순둥이였나 보다. 지금도 순하다. 건들지만 않으면.


아무튼, 그런 일을 겪고 나서(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리점은 아빠가 온전히 맡았고, 엄마는 집에서 나와 오빠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베지밀을 수레로 가정에 배달하는 아주머니들, 트럭으로 영업점에 배달하는 아저씨들, 그리고 사무를 보던 언니가 있던 사무실과 창고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 생애 첫 운전(?)


어느 여름, 어릴 때 아빠랑 거래처에 갔다가 혼자 트럭에 남은 적이 있다. 아빠는 차 문 옆에서 거래처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겁도 없이 운전석으로 가서 핸들을 돌렸다. 아빠가 시동을 켜놔서 차가 움직였다. 당시 너무 놀라서 뛰어오던 아빠 모습을 거울로 봤는데 나는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겨우 차를 잡고 난 후,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얼굴에 가득했던 아빠의 얼굴도 기억난다. 


나중에 아빠가 웃으면서 이야기해줬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때를 꼽겠다고 했을 정도로, 아빠에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운전면허 따는 것을 극구 반대했었다. 아빠가 평생 운전해 줄 테니 운전할 생각은 안 해도 된다며, 항상 뒷좌석에 안전하고 편하게 앉으라며.



| 우유 급식과 베지밀C


초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했다. 우리 집에서는 베지밀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우유 급식을 신청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우유가 먹고 싶었다. 우유 마시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우유가 싫다며 마시기 싫다는 친구가 있으면 달라고 해서 먹었을 정도로 우유를 먹었다. 우유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아마 베지밀을 먹기 싫은 마음에 더 크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같은 것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때는 또래문화가 중요하니까.


베지밀은 A와 B가 있다. A는 고소한 맛, B는 달콤한 맛. 항상 A보다 B가 잘 나가서 거의 A만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유맛이 나는 C가 나온 거다. 포장지에 콩과 젖소가 같이 그려져 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우유와 두유를 섞은 거였던 듯하다. 시제품이 나왔을 때 먹어보고 나서 그걸 좋아했는데 우유와 경쟁하기에 상품성이 없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되어서 아쉬웠다. 



| 아이의 첫 베지밀


두 돌까지는 아가에게 분유를 먹이고 싶었으나, 아가는 돌 무렵에 스스로 분유를 뗐다. 그래서 서울우유의 '우리 아이 첫 우유', 매일유업의 '상하목장 우유', 베지밀 '토들러'를 번갈아 먹였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뭐든지 잘 먹어주는 아가가 그저 고마웠다.


아이에게 베지밀을 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는데 좋은 거 먹이겠다고 아가에게 베지밀을 먹이는 내가 신기하기도 했고, 아빠의 베지밀 대리점이 그립기도 했다. 베지밀은 유리병이라 관리하기도 어려웠는데 참 성실하게 일했던 아빠의 모습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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