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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상자 Nov 01. 2020

첫 술은 아빠 무릎 위에서

어린 시절, 아빠 무릎은 나의 지정석이었다. 친척집에서 밥 먹을 때도, 아빠가 친구들과 한잔할 때도, 아빠는 나를 그곳에 앉혔다. 내가 앉기 싫다고 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내 자리였던 그곳.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술을 마셔봤다.


4~5살 정도였으려나? 아빠 친구 모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화기애애 왁자지껄한 상황에서 심심했던 내가,  목이 너무 말랐나 보다. 아빠한테 물을 달라고 하면 됐을 텐데 자립심 강한(?) 나는 눈 앞에 있는 작은 잔에 담긴 것을 마셨고, 그건 인삼주였다.


이야기하느라 바빴던 어른들은 내가 뭘 먹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가, 나중에 내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놀랐고, 내가 꼭 쥐고 있던 술잔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그다음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는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땐 정말 눈앞이 깜깜했어."라고 했다.


나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술을 마시지 않는 기간이 길어져서 예전만큼 마시지는 못하지만, 정말 정말 찐하게 한잔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 아빠와 함께 한잔했던 기억이 많기 때문일 거다. 그 시작이었던 인삼주 한잔. 지금 내 딸의 나이가, 그때의 내 나이다. 아빠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간다. 아이와 함께 할 때 긴장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추억 한 조각.


딸의 말이 부쩍 늘었다. 이제 아가라고 하기 무색할 만큼 대화가 된다. 딸이 "아가 아니야."라고 한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아가라고 하고 싶다. 아빠가 그랬다. 내가 환갑이 넘어도 아빠한테는 아가라고.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많이 커도 마냥 귀여워 보이는 딸을 보면서, 아빠가 했던 말의 의미와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된다. 먼 훗날, 딸과 한잔하게 되면 이런 이야기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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