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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상자 Nov 01. 2020

내 친구들이 더 좋아했던 아빠

아빠의 청년 시절 별명은 프랑스 배우인 알랭 들롱(Alain Fabien Maurice Marcel Delon)이었다고 한다. 우리 아빠를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잘 생긴 편이긴 하다. 할머니(아빠의 엄마)가 참 고우셨는데, 아빠는 할머니를 참 많이 닮았고 나는 아빠를 닮았다. 내가 예쁘다는 건 아니다. 그냥 닮은 거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할머니는, 나만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며 항상 우셨다.


아빠는 인기가 많았다. 외모도 한 몫했겠지만, 성격이 워낙 서글서글해서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좋아했고, 아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빠가 지인들과 당구를 치러갈 때 짜장면 사준대서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아빠는 설렁설렁 웃으면서 치는데도 항상 이겼다.


고등학생 때 남자 사람 친구들이 놀러 와서, 아빠가 친구들을 당구장에 데려간 적이 있다. 아빠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설렁설렁 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친구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이긴 사람 사위 시켜주세요.”


친구는 장난이었지만, 아빠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그다음에도 당구를 그렇게 진지하게 치는 아빠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고등학생을 이기겠다고 열심히 임하던 당구 고수라니. 아빠의 굳은 표정이 생각난다.


아빠는 친구의 그 발언이 충격이었는지 “사위 테스트 목록”을 작성했다. 몇 가지 목록만 생각해봐도 현재 남편은 아마 통과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아빠한테 테스트당하는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의 빈자리가 가장 많이 느껴질 때는 명절이고, 그다음은 남편이랑 싸웠을 때인 만큼, 남편과 싸웠을 때 아빠에게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면 아빠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투정 부릴 곳이 있는 사람이 너무 부럽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던 한 친구는 가끔씩 직접 만든 음식을 가지고 놀러 오곤 했다. 같이 있던 아빠랑 함께 먹었던 날이 있었는데, 아빠가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자, 그 친구는 한동안 그것만 만들어 오기도 했다. 그 친구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아빠와 나의 관계를 항상  부러워했다.


어느 날, 집에 왔는데 아빠가 통화를 하고 계시던 날이 있었다. 내가 주변을 돌아다녀도 즐겁게 통화만 하시길래 ‘엄청 친한 친구랑 통화하시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 후, 아빠의 한 마디에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고상아, 네 친구 ○○다.”


아빠는 내 친구들과도 격 없이 지냈고, 내 친구들도 거의 대부분 아빠를 좋아했다. 아빠가 여러 사정상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안 경제는 심각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있어서 아빠와의 추억이 더 좋게 남은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만큼 슬퍼했던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다.


대학생 때, “경제력이 없는 부모는 부모라고 할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선배와 크게 싸웠던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내게, 고생 안 해본 막내딸 티가 난다는 등의 말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나와 아빠에 대해 잘 모르면서 생각 없이 내뱉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를 좋아했던 친구들이 참 그리웠다. 모두들 잘 살고 있겠지. 정말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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