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난 학기 강의 평가를 정리했다. 덜덜 떨면서 평가 사이트를 연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내 생각보다 점수가 꽤 높았다. 무엇보다 서술형 평가에도 과분하게 좋은 말이 많아서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Z세대의 냉정한 평가에 상처 받는 교강사들이 많다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엄빠 찬스도 인맥도 없는 내게, 전공 강의를 맡겨준 학교도, 좋은 평가를 해준 학생도, 정말 너무 감사할 뿐이다.
평가 결과 정리 후, 서술형 평가의 텍스트를 분석해서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혼자 힘으로 뭔가 해낸 이런 일이 생기면, 아빠 생각이 난다. 칭찬받고 싶어서. ㅎㅎㅎ
아무튼, 남편과 평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세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나는 X세대 끝자락과 Y(밀레니엄)세대 초반에 어중간하게 껴 있어서, 어느 곳에서는 X세대로, 어느 곳에서는 Y세대로 구분되어 있는데, 남편은 자신이 Y세대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럼 난, 당신과 다른 세대를 하겠다."며 X세대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딸의 한 마디.
나는 엄마 세대 할래요.
가끔 부부끼리 이야기하면, 혼자 잘 놀고 있던 딸이 갑자기 끼어든다. 놀고 있더라도 귀는 엄마 아빠 쪽으로 열어 놓나 보다. 진지하게 대화하다가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의 말에 우리는 빵 터지고 만다. 세대라는 의미는 모르지만, 나와 같은 걸 하겠다는 유일한 내 편. 너무나 든든한 거. 딸이 없는 내 인생은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엄마 세대 할 거야?"라면서 아이를 꽉 안고 좋아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 품에서 벗어나 다시 놀기 시작하는 아이. 시크하고 쿨한 너란 아이.
남편은 옆에서 삐쭉삐쭉. "그러니까 네가 아빠한테 점수를 못 따는 거야."란다. 딸이 아빠한테 왜 점수를 따. 아빠가 딸한테 따야지. 아직도 현실을 모르고 있어. 아이는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는 것뿐이거늘. 그냥 아빠도 예뻐해 달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자기는 '딸바보'가 아닌 '딸천재'를 지향한다나 뭐라나. 누구보다 자식 바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남편으로 선택한 건데, 속았다.
그나저나 가끔 딸과의 미래를 그려 보는데, 하루하루 말이 늘어가는 아이를 보며, 이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정말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때 나는 갱년기일 테니, 중간에 낀 남편이 잘 견뎌주면 좋겠다. 지금 하는 걸 보면 좀 걱정된다. 우리 가정의 큰 위기는 아마 그때 닥치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딸과 세대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그 시기(딸은 사춘기, 엄마는 갱년기)가 지나면 더 돈독해질 수 있을까? 딸과 정말이지 잘 지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했던 든든한 친정 엄마가 되고 싶다. 물론, 남편은 딸 인생에 남자는 없다고 선언(?)했고 딸의 선택을 존중하겠지만, 귀엽고 자상한 사위와 알콩달콩 잘 사는 딸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너무 멀리 갔네.
내 결심 중의 하나는, 딸이 성인이 되어서 투표권이 생겼을 때, 딸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행사하겠다는 거다. 무조건 그러겠다는 건 아니다. "여자라서 뽑을 거야.", "종교가 같아.", "잘 생겼어." 뭐 이런 이유만 아니라면, 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내 표를 하나 보태고 싶다. 그들의 세상일 테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는 게 우선일 거다. 대화도 많이 해야 할 테고.
고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내 꿈에 딸의 비중이 너무나 크다. 그 꿈을 딸과 함께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