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상자 Feb 17. 2020

이사 - 삶의 공간 이동

얼마 전, 보육원 퇴소 청소년들의 자립 지원과 관련된 사업 내용을 봤다(2018년 보육원퇴소청소년 자립지원사업 결과보고 : 아름다운가게).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내 꿈 중의 하나, 보육원장)을 하기 위한 준비는 하지 않고,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건지, 나 자신이 너무 답답했다. 그리고 내가 했던 수많은 이사 경험이 생각났다.



| 너무 많은 이사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초등학교 6학년, 오빠 중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학 가는 게 싫어서 울고 불고 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가장 좋은 기억이 있는 집은, 마당에 강아지 2마리를 풀어놓고 살았던 단독 주택. 언젠가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 혼자만의 이사(자취 시작)


음 자취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이 아니라, 방)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집을 알아보는 건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보 찾는 게 쉽지 않아 직접 부동산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교통비 아끼려고 대학 주변으로 알아봤는데 부모 없이 20대 초반 여자 대학생 혼자 집을 알아보는 게 흔치 않아서 인지, 부동산 아저씨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기댈 어른의 부재에 항상 마음이 아렸다.


어느 시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친척 집에서 몇 달간 살아본 적도 있다. 돈 모으고 마음 편히 있으라는 친척 어른의 배려였다. 하지만 잘 대해주셔도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또래 사촌은 늦잠 자는데 나는 이른 아침부터 아르바이트하러 나가는 현실도 싫었다. 부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다시 자취를 시작했다. 내 자격지심이다.


계약 만료 때(1~2년)마다 이사 갈 곳을 알아보고 여러 일 처리를 해야 하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물건도 꽤 많다. 아무튼, 전히 내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사의 순서나 시기에 오차(머리가 점점 나빠지고 있...)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 본다. 초본을 떼서 차근차근 써볼까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화장실이 밖에 있던 옥탑방

20대 초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방구석에 방치되어있던 피아노 판 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 선배에게 빌린 돈을 합해 자취 인생을 시작한 곳. 주인집이 바로 아래라서 가끔 밥 먹으러 오라고 하시기도 하고 빨래 돌리러 오라고도하셨다. 그 이후로 주인이 같이 거주하는 건물은 피하게 됐다. 


방에 침대와 책상만 있던 그곳. 화장실이 밖에 있던 그곳. 겨울엔 엄청 춥고 여름엔 엄청 더웠던 그곳. 겨울에 보일러가 얼었을 때 그 비용을 내가 거의 감당해야 했던 그곳. 옥탑방의 낭만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으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뭐, 좋은 옥탑방도 있긴 하겠지만.



휴학하고 다니던 회사에서 지원해주신 작은 원룸

반액 장학금 대상자가 됐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액을 내기에는 모아둔 돈이 모자랐다. 연이어 등록하지 않으면 장학 대상이 취소된다고 해서(등록금을 낼 때 장학금액을 제하고 납부하는 시스템. 장학금 받고 나서 자퇴하는 학생이 있어서 그런 기준이 마련된 듯하다.), 장학금을 포기하고 휴학했다. 당시, 그걸 왜 포기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등록해 버리면 몇 달간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기본 소득이 중요한 이유다. (“조건없이 월 30만원 지급” 탈가정 청소년에게 미친 영향 : 여성주의저널 일다)


그러고 나서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작은 회사의 경리 업무였다. 사장님의 배려로 1년 정도 다닌 후에 복학도 했고, 장님이 회사 근처에 원룸도 제공해주셔서 마음 편히 생활했다. 계속 일할 수도 있었지만 졸업 후 전공 관련 분야로 취업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면서 그곳에서도 나왔다. 힘들기도 했지만 정말 감사한 나의 첫 회사였다. 



창문 없는 고시원

겁이 많아서 여성전용으로 구했다가 돈이 부족해 창문 사수하지 못했다. 화장실은 당연히 공용이고, 냉장고 역시 공용이었는데, 내 물건에 호수를 써놔도 없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되도록 밖에서 먹고 들어가곤 했다. 나중에 창문이 있고 조그만  정사각형 개인 냉장고가 있는 고시원에 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에서도 어떻게 살았는지 쨘할 뿐지만.



처음 당해본 사기

학교 주변에 싼 집이 나와서 동아리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이사했다. 그 이삿날은 소규모 동아리 MT였을 정도로 즐거운 날이었다. 게다가 부동산 아저씨의 어머 집이라길래 잘한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사 후 갑자기 사람들이 왔다. 그 집을 계약한 사람이라는 거다. 어이가 없었다. 알고 보니 부동산 아저씨가 자기 어머 몰래 나와 계약한 것이었다. 얼마나 된다고 그 보증금 꿀꺽. 역시 내가 가진 돈으로는 얻을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계약하신 분이 배려해주셔서 집 구할 때까지 그 집의 작은 방에서 살았다. 그리고 집값만 생각하면서 아예 모르는 동네로 이사 갔다.



경기도민으로 1년, 퀴퀴한 반지하

그래서 처음으로 경기민이 됐다. 그때 주민등록증을 갱신해서 아직도 그때의 주소가 전면에 쓰여 있다. 나의 첫 고양이를 만난 곳이기도 하고, 퇴근길에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를 임보(고양이를 입양하기 전 임시 보호하는 것) 하기도 했다가 입양 보내기도 했던 곳이다.


아빠 사업 망한 후 반지하에 살던 때가 너무 싫어서 반지하는 죽어도 가기 싫었는데 결국 돈에 맞춰 반지하에 갔다. 그 돈에 갈 수 있는 곳은 옥탑방이나 반지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내겐 옥탑방보다는 반지하가 나았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반지하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문제는 더 있었다. 내가 살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이다. 너무 싸게 넘어가서 내겐 보증금 반환 순번이 오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월세를 내지 않으면서 보증금을 까는 방식으로 몇 달 살았다. 하지만 결국, 다 까지는 못했다.



다시 서울로, 게다가 2층

드디어 반지하 탈출. 석사과정을 할 때라서 학교 주변으로 얻었다. 그때만 해도 학교 주변 원룸이 다른 곳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동문 장학금을 받으려고 동 대학원으로 진학한 거라, 대학 후배들과 술을 많이도 마셨던 때다. 같이 대학 생활을 했던 후배들과는 편의점 폐기 상품(내가 편의점 알바를 했던 때)이나 과자에 소주가 대부분이었고, 떡볶이와 순대가 안주일 때는 고기 먹는다고 좋아했는데, 이때는 돈 좀 번다고 안주도 잘 챙겨 먹었다. 그 돈을 모았으면 학자금 대출을 좀 더 빨리 갚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언급할 순 없지만,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너무 무서워서 집주인에게 잠금장치 보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분내게 "자기 딸도 잠금장치 하나만 달고 산다."라고 말했다. 아저씨 딸은 이런 원룸에서 안 살겠죠.



 전세

정말 코딱지만 한 원룸이었지만 전세로 살고 싶어서 계약했다. 그러나 계약 만료 시에 다시 월세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전세로 사는 것보다 월세로 사는 것이, 집 상태가 좋았기 때문이다. 이사 갈 때 부동산 아저씨가 자기 덕에 집이 빨리 나갔다며 복비를 달라고 했다. 10만 원이나. 미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라고 생각한 거지.


"계약 기간 만료로 나가는 건데 무슨 복비요.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웃으면서) 착하게 생겨서 독하네."


자 살아가면서 어른에 대한 실망만 늘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보다,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독해졌나 보다.



결혼 전, 마지막 집

역시 작은 원룸이었지만, 내 자취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와 장소다. 출근길에 본 안내문(?)을 보고 갔었는데 처음엔 건물에 주인이 산다고 해서 꺼려졌다. 하지주인 할머니가 처음부터 저렴한 월세로 해주셨고 계약 만료 시에 월세를 올리지도 않으셔서 감사하게 오래 살았다. 뵐 때마다 인사드리고, 내가 먹을 간식거리 사면서 할머니 댁에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건물에서는 내가 할머니 손녀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결혼으로 이사 무렵, 집주인이 바뀌게 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어 자녀가 주인이 되었다는 거다. 한동안 할머니가 안 보이셔서 궁금했는데 급하게 결정된 건지 인사도 못 드렸다. 그나저나 입주자 월세를 알아보면서 할머니 자녀가 내게 했던 말이 참 그랬다.


"여태 이거 내고 살았어요? 양심이 없네."



결혼 후, 우리 집

결혼 후, 두 번 이사했다. 첫 신혼집은 언덕 위의 투룸. 그곳에서 아가가 생겼고 임신한 몸으로 오르내릴 엄두가 나지 않아 평지로 이사했다. 그동안 혼자 짐이라 용달 불러 지인과 함께 이사했는데, 이때 포장이사를 처음 이용해봤다. 편하긴 했지만 만삭일 때여서 이사할 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청약이 되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내 인생 첫 아파트. 다시 경기도민. 두 번째 포장이사는 괜찮았다. 당분간 이사는 하지 않겠지만 동네에 잘 정착해서 아가에게 동네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다.


자취한 기간이 오래되어 살림살이가 거의 내 물건이다. 그래서 그동안 남편 취향을 반영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남편 책상을 바꿨는데, 얼마나 좋아하던지.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 가장 친한 친구


제일 힘들었던 건 버거운 일이 생길 때마다 털어놓을 친구나 조언을 구할 어른이 없었다는 거다. 친구들에겐 내 삶의 무게를 나누기 어려웠고, 친척 어른들에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가 있으니 거리를 두게 됐다. 그래서 나와 제일 친한 친구는 술이었다.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요즘 멀어지긴 했지만,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아가에게 잘 소개해주려면 다시 친해져 놔야겠다.


기승전술. ㅎㅎㅎ 정말 찐하게 한잔하고 싶다. 그리고 보육원 퇴소 청소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차근히 생각해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상하게 나이 들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