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크림이 섞여든 것 같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만발한 벚꽃이 흩날리던 날 배낭을 짊어지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날은 구름도 없었다. 7년이 흘렀다.
여행 날짜를 결정하고 항공편을 선택하는 동안 수많은 선택지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금방 피로해졌지만 메일함으로 들어온 이티켓을 확인하고는 제일 큰 일은 이제 끝났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잊기 전에 미리 항공사에 채식 식사 신청을 했고, 공항 철도와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했다.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봐야 했고, 며칠간 묵을 숙소도 선택해야 했다. 한동안 이런 종류의 자잘한 일들을 결정했고, 해야 하는데, 라며 미루었다.
뭔가를 계획하는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여행을 가려면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까지 갈 방법을 정하고, 가서 잠 잘 장소를 구하고, 가는 동안 마실 물과 따뜻한 옷만 있으면 되는 류의 사람이다. 가서 할 것, 가서 먹을 것은 일단 가보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기분에 따라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막상 갔을 때의 기분도 가기 전 내 방에 앉아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고 보면 가보면 알게 될 거라기 보단 거기 가지 않고 여기서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이 그 말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런 나도 처음 배낭을 지고 유럽 여행을 했을 때는 먼 길 왔으니 알찬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름대로 큼직한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랬을 때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 카프리 섬에 숙소를 예약한다.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도착해 보니 천국이 따로 없다. 벌써 떠날 날이 미리 슬프다. 기쁘고 슬프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다가 떠나기 전 날 생각한다. 여기 너무 좋다. 더 지내고 싶다. 숙소 주인에게 물어본다. “내일이랑 모레 예약 차 있나요?” 이틀 더 묵기로 한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다음날 카프리 섬을 떠나 포지타노의 어느 호텔에 묵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 여행의 유일한 호텔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환불도 안 된다. 카프리를 선택하면 포지타노를 즐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포지타노를 거닐지 못한대도 지금 당장 카프리 섬에 이틀을 더 묵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마침 숙소 연장을 할 수 있게 된 게 행복하다.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와 같은 결론을 내고 준비했던 계획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틀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감사하겠다는 다짐까지 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맹세까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남은 여행동안의 계획도 이런 식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걸 학습한다. 그리고 결국 남은 계획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계획을 만든다고 안 하던 짓을 하면 이렇게 계획을 짜는 시간과 불필요한 호텔 요금 같은 것만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계획이라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찾으며 소파에 앉아서 부지런히 뇌를 굴리는 동안 이메일이 하나 도착하는데…… 한국 출국편이 취소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인천을 출발해 홍콩을 경유했다가 호주 멜번에 도착한 뒤 뉴질랜드로 들어오기로 되어 있던 고단한 일정이, 인천, 홍콩, 시드니, 멜번, 그리고 뉴질랜드 들어오는 연결편 아직 없음, 의 기막힌 일정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 항공편이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출국 날짜를 조정할 수도 있었다. 찾아보니 원래 일정보다 하루 앞당겨 돌아올 경우에 인천을 출발해 시드니에 경유했다가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마음에 드는 항공편이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가는 한국에서 보낼 시간이 하루 줄어들긴 했지만 이렇게 수월한 여정이라니 꼭 이코노미석이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다. 그래, 어쩌면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7년 만에 방문하는 서울은 이제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 여행자로서 서울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스무 살의 내가 거닐던 장소에 가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을지도 모른다. 서른넷의 나는 여행자가 되어 북촌과 삼청동을 걷고 인사동을 걷고 광화문도 걷다가 교보문고에도 들어갈 것이다. 한국말로 쓰인 책들이 이 공간을 다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덕수궁에도 가고 미술관에도 들어갔다가 그 앞에 와플 집이 아직도 있다면 하나 사서 손에 들고 돌담을 따라 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