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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May 11. 2023

원고지 감옥과 오리발


  초등학교에 입학한  제일 처음 경험한 경쟁은 경필 쓰기 대회였다. 제시문을 보고 네모난 깍두기 모양의 칸에 정자체로 글자를 따라  다음 제출하면 보기 좋게  아이들을  추려 상을 주는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어설픈 솜씨로 집중해 가며 글자 하나하나 따라 그리다시피 했던 나는 어쩌다 보니 상장을 받아 들고 집에 오게 되었다. 그때에는  방법이 없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게 바로 고통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뭔가를 못하면 (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잃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셈이다. 나는 그저 나일뿐, 그러니까 자유의 몸인 것이다. 앞으로 하게  일들도 잘할 필요 없이 그냥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반대라면 이야기 역시 반대로 흘러간다. 처음에 뭔가를 잘하면 (역시  자신을 포함한) 주변에서 기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 일도 기대하게 되는  사람 심리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용기 있는 마음이 아니라면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가로 획과 세로획이 만들어낸 깍두기가 가득  세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깍두기들은 감옥 창살이 되어버렸다. 창살 뒤에서 전전긍긍했다. 학년이 올라간 뒤에는 빨간 깍두기의 세계를 마주했다. 빨간 선들이 구성한 감옥은 원고지의 세계였다. 글쓰기 숙제가 있으면 원고지  묶음을 사야 했다.  윗줄은 비우고 그다음 줄의 중앙에 제목을 써야 한다고 했다. 제목의 아랫줄은  비우고,  아랫줄로 내려가 오른쪽 구석에 학교 이름을 쓰고, 다음 줄에 학년과 반을  , 다시 다음 줄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줄은  비우라 했다. 문단이 시작되는  글자는   들여 써야 했으며 어떤 문장부호는 깍두기의 중앙에 써야 했지만,  어떤 문장부호들은 깍두기의 한쪽  구석, 혹은 아래 구석에 써야 했다. 이런 규칙을 따르지 않거나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리면 빨간 펜으로 여기저기 교정된 원고지 뭉치를 돌려받았다. 빨간 펜이 잔뜩 묻은 원고지는 얼마나  글에 문제가 많은지 알려주는 지표와 같았다.


  용기라는  경험해  적이 없었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던 나는 빨간 펜을  묻히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원고지에 바로 글을 쓰지 않고 연습장에 미리 쓰고 나서 원고지 위에 옮겨 적었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다음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실수로  글자를 옮겨 쓰지 않았다거나, 띄어쓰기가 틀렸다거나,  바꿈을 하지 않았다거나, 들여 쓰기를 깜박했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걸 바로 발견하면  문제는  된다. 지우고 다시 쓰면 되니까. 하지만 초기에 발견하지 못한 작은 실수는 나중에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면 글자들이 모두  칸씩 밀려나야 띄어쓰기 실수를 고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최악의 경우 원고지가 모자라는 일이 생긴다. 이미 밤이 어두워  원고지를  곳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내가 느낄  있는 최대치의 좌절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원고지에 글을 쓰는 규칙을 확실하게 습득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원고지에 글을 쓰는 일에 질려버렸다.  이상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게  후에도 서랍 속에 한동안 남아있던 원고지 뭉치가 눈에 띄면    안을 가득 채웠던 좌절이 떠올랐다. 자라면서 만난 몇몇 사람들이   조언이 있는데 뭔가를 잘하고 싶다면 그걸 질리도록 반복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식의 조언이었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다. 뭔가를 잘하고 싶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말이다. 질렸든 어쨌든 그럼으로써 원고지 세계의 법규는 내재화했으니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원고지 쓰는 규칙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시간 자체가 아닐까.


  얼마 전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번째 수영 강습에 다녀온 날의 일이다. 물에서 글라이딩   해주는 걸로 간단히 몸을  다음 수영 강사 안젤라가 제안했다. “오늘은 오리발을 신고  봅시다.” 처음 신어보는 오리발은 어색했다. 오리발을 신고 물을 차려니 물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안젤라가  발목을 잡고 흔들며 조금  힘을 빼고  보라고 했다. 그의 조언을 염두하고 다시 한번 발차기에 도전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안젤라가 제안했다. 이번엔 뒤로 누워서   해보죠. 그대로 누워 발차기를 하니 시작하자마자 뭔가 감이 왔다. 골반이 움직인  무릎이 자연스레 따라 움직이고 그다음에 발목으로 연결되는 움직임.  움직임들이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드디어 오리발이 오리발처럼 느껴지지 않고  지느러미가  듯했다. 누워서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리며 레인의 끝에 도착했다. 안젤라가 환호했다. 다시 처음의 엎드린 자세로 몸을 뒤집으니 그때까지  되던 발차기가 자연스럽게 되기 시작했다.


  나는 안젤라의 강습 방법이  맞는 사람이다. 그는 뭔가를 질릴 때까지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의 수업 철학에 대해 이야기해  적은 없지만 그걸 경험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재미에 가장  가치를 두고 있는  같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잘할 때까지 반복하도록 하지 않으며, 반대로 도전하자마자  번에  해내는 동작들은 굳이   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못한다고 자책하는 마음도 들지 않고 잘한다고 우쭐한 마음도 들지 않으며 다음 배울 것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그저 재미있다. 시간 가는  모르고 놀이에  빠지곤 했던 아이였을 때처럼. 뭔가를 기술적으로 잘하는 일이 중요하다면 질리도록 반복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려면 질려선  된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재미가 없으면  어떤 것도 계속할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에  삶에 오리발이 필요한 이유다.


  오리발을 신고 수영을 하는 동안 물개를 떠올렸다. 물개가 물속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꼬리를 유연하게 사용한다. 여러 바다 생물들은 타고난 몸의 모양이 어떻든 공통적으로 물속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물의 세계를 제대로 경험해   태어난  서른네 해가 흐르고 나서다. 물기 없는 건조한 세상에서 살던 아홉  무렵의 나는  바싹 말랐었나 보다. 뻣뻣한 원고지의 규율에 사로잡혀 빨간 창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원고지의 법규는 어린 손가락을 스쳐가며 쓰라린 빨간 줄들을 남기는데도  창살을 부여잡은 손을 놓지 못했으니.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물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는  이상 창살 속에 들지 않았다.  앞에 창살이 보인다면 나를 최대한 흐느적거리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렇게 창살 가까이 다다랐을 , 나는 물컹, 하고 빠져나온다. 그러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창살은 거기에 있다. 이미 지나온 곳에. 원고지에 쓸린 손가락의 빨간 줄들은 이제 물이 닿아도 쓰리지 않다. 아홉   경험하지 못했던 순수한 재미를 서른이 넘어 새롭게 발견하고 있으므로.  경험을   있게   안젤라가 고맙다. 그렇지만 그걸 구구절절 표현하긴 아무래도 이상하니, 대신 그걸 구구절절 글로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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