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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13. 2021

죽음을 경험한 두 남자, 그들이 만난 극한 세상

알피니스트 박정헌과 다큐멘터리스트 이성규의 대담



두 남자는 도플갱어다. 모험가 박정헌은 히말라야 고봉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고, 〈오래된 인력거〉를 연출한 이성규 감독은 간암 4기로 투병 중이다. 두 남자는 늘 죽음을 담보로 모험의 길에 나섰다. 그때 두 남자에게 다가왔던 낯선 신이 바로 '힌두의 신'이다. 고산 등정과 다큐 제작이라는 방식으로 각각 힌두의 신을 찾아가려 하는 두 남자가 만났다.


둘이 만난 곳은 춘천의 한 카페였다. 살아온 궤적을 보면 한 번쯤 만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일탈한 삶을 살았던 두 남자는 경험한 자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주고받았다. 얼굴이 아니라 내면이 닮은 ‘도플갱어(꼭 닮은 사람)’의 대화는 깊고 깊었다.


대담을 마치고 서로의 파토스를 확인한 후 이성규PD는 "우리 둘이 함께 뭔가를 만들면 해볼 만할 것 같다. 그곳이 히말라야든 남극이든 북극이든,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서로에게 상승기류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박정헌 대장의 어드벤처와 나의 스토리텔링이 만나면 괜찮은 대작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제안했다. 




한 명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모험가 박정헌. 1994년 안나푸르나를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그는 8000m급 봉우리 8곳을 오른 후 촐라체에서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 최강식을 구하고 동상에 걸려 손가락 8개를 잘라냈다. 부상 이후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산맥 2400㎞를 종단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의 모험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2012년 KBS에서 방영된 〈이카로스의 꿈〉이다.


다른 한 명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을 가장 잘 이해시키는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성규. 2010년 아시아권 최초로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오래된 인력거〉를 연출했다. 독립 다큐멘터리계의 맏형으로 한국독립PD협회를 창립해 방송사의 불공정 계약과 맞서기도 한 그는 지금 간암 4기로 투병 중이다. 


대담 당시 두 사람은 또다시 새로운 도전과 모험 앞에 서 있었다. 박정헌은 히말라야 산맥을 자전거·카약·패러글라이딩 등 무동력 장치를 활용해 종단하는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성규 감독은 자신을 키워준 땅 인도와 네팔에서 자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예정이었다. 둘 다 죽음을 담보로 힌두의 신을 찾아갈 예정이었는데 박정헌은 도전에 성공했고 안타깝게도 이성규PD는 2013년 사망했다.



주) 2013년 이뤄진 대담이다. 


사회(고재열):두 분이 한 번쯤 만났을 것도 같은데 만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이성규(이):〈이카로스의 꿈〉 제작과 관련해 한 다리 건너서 제안이 왔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니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드벤처 다큐멘터리에 노하우가 없다. 위험한 지역에 ‘짱박혀서’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스토리를 찍어내는 것은 잘하지만 위험한 모험 자체를 즐기지는 못한다.


박정헌(박):〈이카로스의 꿈〉 제작을 준비하고 촬영팀을 섭외하면서 최신 장비를 다룰 수 있는 분을 알아보니까 대부분 이성규 감독님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


사:두 분의 공통점은 죽음을 응시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박정헌 대장은 과거형이고 이성규 감독은 현재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박:죽음은 한순간이다.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를 구하려고 할 때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나와서 나를 유혹했다. 또 다른 나는 ‘최강식은 죽었다’고 나에게 끝없이 속삭였다. 후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죽는 길이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는 길이었다. 23m 깊이 크레바스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후배의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나도 척추가 나간 상황이라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일을 끊어야만 내가 살 수 있었다. 크레바스 안에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오히려 절망했다.


이:보스니아와 르완다와 소말리아에서 죽음을 가까이서 보았다. 전날 밤 같이 술을 마셨던 외국 기자가 내 옆에서 총에 맞아 죽는 것도 보았고 총알이 내 옆을 스치는 것도 경험했다. AK 소총의 총구가 내 목구멍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겁나지 않았다. 묘한 아드레날린이 나오면서 ‘나는 불사신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타자의 죽음을 봤을 때와 나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는 차이가 컸다. 죽음 앞에서 어설프게 철학자 흉내를 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직시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크레바스에 빠진 후배는 어떻게 살렸나?


박:운명처럼 후배의 배낭에 그의 목숨을 살릴 도구가 있었다. 로프를 타고 올라오는 데 쓰는 도구였다. 원래 내가 필요 없다며 빼고 오라고 했던 것인데 그는 그것을 챙겼다. 등반은 속도가 생명이다. 위험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무게를 줄여야 하기에 빼라고 했던 것인데, 그 잉여의 도구가 결국 그의 목숨을 살렸다.


사:왜 그렇게 위험한 모험을 하는가?


박:등반은 죽음을 각오한 스포츠가 아니라 죽음을 피하는 예술이다. 사람들은 등반가를 무모한 사람으로 보는데 그들은 모두 계산하며 움직인다. 촐라체에 오르기 전에 15일간 관찰했다. 돌이 떨어지는 것부터 눈사태의 방향까지, 모든 것이 파악되었을 때 올랐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모든 계산을 마친 뒤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계산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나머지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몽골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BBC 다큐팀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와는 인원과 장비가 많이 차이 났는데 우리와 같은 내용을 찍고 있었다. 위축되었다. 그들은 트럭을 개조해서 이동하면서 찍는데 우리는 말 위에서 찍었다. 그런데 결과물은 우리 쪽이 더 깊이 있었다. BBC 제작진도 인정했다. 그들이 찍는 것을 우리는 찍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을 찍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을 넘어서고 싶었다.



사:둘 다 가장 사랑했던 산과 인도에서 가장 큰 시련을 당했다.

이: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인 시바는 파괴의 신이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신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촬영할 때 수행자의 면도기를 빌려서 그들처럼 가죽에 쓱쓱 문대고 면도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 헌혈을 했더니 다시는 헌혈을 하지 말라고 했다. B형 간염이라고. 인도는 나를 유명하게 하는 대신 내 몸에 파괴의 씨앗을 뿌렸다.


박:큰 산행 이후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인도가 이 감독님의 간을 가져갔듯이, 히말라야가 나를 만들었지만 나에게서 8개의 손가락을 가져갔다.


사:왜 히말라야에 가고 왜 현장으로 가는가?


박:산에 가는 이유는 내가 본 것 중에 히말라야가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을 다시 보기 위해서 갔다. 7000m급 산에서 나는 패러글라이딩으로 12분 만에 내려왔는데, 후배들은 2박3일에 걸쳐서 내려왔다. 걸어 다니면서 보는 산이 2D라면 하늘에서 보는 산은 3D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이: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 삶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다고 잘 보이는 게 아니다’라고 주인공이 말하는 것처럼 때로는 멀리서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너무 안으로만 들어가서 클로즈업을 했던 것 같다. 이제 롱샷이 필요하다.


사:산에 가고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둘은 원칙론을 고수했다는 평을 듣는다.


박:나는 알피니스트 등반이 가장 탁월한 등반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이 일대일로 만나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가장 올바른 등반이라고 생각한다. 대규모 원정대는 산을 힘들게 한다.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산에 버리고 오는 쓰레기만 몇 톤이다. 성수기에는 베이스캠프에 3000여 명이 몰려 땅 싸움을 벌인다.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남에게는 감히 강요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셰르파 없이 최소한의 장비로 등반하는 것은 위험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내 방식대로 하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 등반에는 수만 가지 방식이 있다. 자기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름다운 등반이라고 생각한다.


사:이런 모습을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아내는 냉정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내가 해외촬영 가면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줄 아는데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그냥 공항버스 타는 나를 보고 ‘잘 갔다 와라’ 하고 돌아선다. 냉정하니까 버틴 것 같다. 그런 아내가 결혼할 때 부탁한 것이 있다. 하나는 전쟁터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전장비 없이는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름 지키려고 노력은 했다. 지금은 아이 생각이 난다. 전에는 했던 것을 아이 얼굴이 떠오르면서 놓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는 것 같다.


박:나도 가장으로서 아이들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곤 한다. 손가락 여덟 개를 잃은 이후 히말라야는 나를 수직에서 내려주고 수평으로 가게 했다. 그때 손가락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히말라야 어느 산골짜기나 빙하 속에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모험은 너무나 위험했다. 사고 이후 히말라야 전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었다. 혼자 보기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다. 그래서 〈이카로스의 꿈〉을 기획했다.


이:박정헌 대장과 나의 공통점을 찾았다. 수직으로 내려와서 수평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도 낮은 곳으로 천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방송사 PD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스스로 낮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둘 다 큰 목표를 이루었다.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누군가가 있나?

박:알피니스트는 세상에 노출될 수가 없다. 누구도 그 모습을 찍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찍는 수밖에 없다. 산에서 내려와 카트만두의 숙소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라면을 먹으며 내가 찍어온 비디오를 보면서 혼자 킥킥거렸다. 그 비디오를 나보다 더 신기하게 본 중년 남자가 있었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그 남자는 〈서울의 달〉 〈옥이 이모〉의 김운경 작가였다. 그가 MBC의 김윤영 PD에게 연결해줘서 만나보았다. 찍어온 동영상을 보더니 다른 PD들은 방송이 어렵겠다고 했지만 그는 ‘영상은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는 것’이라며 방송을 강행했다. 그 다큐멘터리가 신년 특집으로 나갔다.


이:KBS 김용두 PD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나를 믿어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누리꾼들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 보면 막판에 돈이 다급해질 때가 있다. 몇 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불과 1000만~2000만원이나 몇 백만 원이 없어서 허덕거린다. 그럴 때면 인터넷에 돈이 필요하다고 올리는데 그럼 신기하게도 돈이 들어온다. 이번에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3000만원이 들어와서 치료비를 확보했다.


사: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둘 다 성찰적인 모험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촬영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다. 그런 과정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과 오해의 매듭을 풀고 있다. 그리고 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들의 삶은 그대로인데 나는 달라졌다. 다큐멘터리로 사람을 다루면 그들을 피사체로 찍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나름 경제적 보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용만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오래된 인력거〉의 주인공 샬림은 여전히 콜카타 거리에서 인력거를 끈다.


박:셰르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셰르파들은 8000m급 등정을 마치면 등정팀의 초대를 받는다. 어떤 산악인보다 8000m급을 많이 오른 셰르파가 있었다. 등정팀의 초대를 받고 이 나라 저 나라를 구경하고 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술로 신세를 한탄하다 힌두쿠시 강에 몸을 던졌다. 문명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비루한 삶을 의식한 것이다. 문명에 나온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사:둘 다 이단아다. 자신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몸담고 있는 업계의 변화를 선도했다.


이:‘판을 크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내 파이도 커진다고 생각했다. 가게가 몰려야 상권이 형성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나가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열매가 달았다. 혼자 맛보기는 아까웠다. 다 같이 한번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적인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싶었다.


박:나도 산악계에서 이단아와 같은 존재다. 8000m급 산을 오른 산악인이 많은 나라 중 하나인 한국 산악계의 현실이 너무나 척박한 것 같아 문제 제기를 많이 했다.


사:계획 중인 새로운 모험은 어떤 것인가?


박:히말라야 2400㎞를 자전거·카약·패러글라이딩·스키 등 무동력 장치를 이용해 종단하는 것이다. 무스탕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다. 그리고 그들이 검은 강이라고 부르는 칼리간다키 강을 카약을 타고 내려올 예정이다. 설산은 패러글라이딩으로 넘는다. 160㎞ 눈의 평원은 스키로 건넌다. 내년 봄에 도전할 생각이다.


이:무스탕 고원이 그립다. 정상 체력일 때는 무스탕 고원에서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체력이 회복된다면 무스탕 고원의 사막과 같은 풍경 속을 걸어보고 싶다. 어떤 기분이 들까? 내 자신이 바람의 말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말의 갈퀴처럼 바람의 말이 되고 싶다. 카메라가 나를 따르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갈 예정이다.


사:둘이 뭔가를 같이 해도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데.


이:〈이카로스의 꿈〉을 만들어낸 것이 KBS의 기술력인 줄 알았는데 오늘 만나보니 아니었다. 우리 둘이 함께 뭔가를 만들면 해볼 만할 것 같다. 그곳이 히말라야든 남극이든 북극이든, 우리 둘이 함께한다면 서로에게 상승기류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박정헌 대장의 어드벤처와 나의 스토리텔링이 만나면 괜찮은 대작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사:앞으로 꿈이 있다면?


이:민족주의적인 것에는 알레르기가 있지만, 한국이 다큐멘터리 강국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아직까지도 다큐멘터리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시아의 시선으로 아시아를 그려야 한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들이 식민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서 그런지 다큐멘터리도 잘 만든다. 그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박:그럴 리 없겠지만 여덟 손가락이 다시 나온다면 촐라체 정상에서 바라봤던 미지의 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던 그 산이 미웠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히말라야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히말라야 2400㎞를 횡단했을 때 ‘이제 히말라야를 조금 알기 시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 꿈을 접었던 그곳에서 다시 꿈을 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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