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는 서로 몰랐던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모교 입학 30주년 기념 모임에서 여행 소모임 방장을 맡고 있는데 여기서 만난 대학 친구들이 그렇다. 대부분 대학 때는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인데 같은 대학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만났고, 급속도로 친해지고 있다.
소모임의 이름은 ‘위스키 온 더 캐리어(이하 위캘)’, 내가 지었다. 여행에서 술 한 잔 하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인데, 적절했던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못 만났고, 지금은 만났다' 대학 때는 다들 행동반경이 과와 동아리와 수업에 제한되어 있어서 볼 수 없었는데 이제 시야가 넓어져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
주말에 위캘 친구들과 함께 가평에서 단체 캠핑을 하고 왔다. ‘위스키 온 더 텐트’ 버전으로. 빌리지하우징에서 운영하는 가평의 ‘블루라군캠프’에서 ‘올 인클루시브 캠핑’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운영진이 식사까지 준비해 주니 우리들끼리의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밤이 무르익을 무렵, 팩트체크 미디어 <뉴스톱>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준일 동기가 갑자기 ‘자기소개’ 시간을 갖자고 해서 서로의 인생을 팩트체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참 친한 척하다가 자기소개를 하자니 좀 뻘쭘했지만, 다들 덤덤하게 자신의 지난 30년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듣고 보니 다들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친구의 인생에서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굴곡이, 어떤 친구의 인생에서는 평탄함 속의 잔잔한 파도가, 어떤 친구의 인생에서는 진한 생의 질곡이 느껴졌다. 다들 묵묵히 자신의 인생 소설 '상권'을 들려주었다.
4년 전 기자를 그만두고 ‘어른의 여행클럽’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인생 중간정산’을 할 수 있게, 그 여행을 통해 ‘인간관계 중간급유’가 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위캘이 딱 그랬다. ‘여행에서 만난 사이’라는 ‘인맥이 아닌 인연’을 맺어주어서 남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겠다는 포부였는데, 이들에게 들어맞았다.
밤을 지새운 이 친구들은 사실 대학 때는 대부분 몰랐던 이들이다. 입학 3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모임에서 새롭게 알게 된 친구들이다. 그런데 마치 ‘30년 전에 만났어야 할 친구’처럼 금방 가까워졌다. 갑자기 든든한 친구들이 내 주변을 에둘러주는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30년 전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와 비슷했다. 너는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구나, 너는 어디가 고향이라 그런 사투리를 쓰느냐, 너는 외국에서 살다 왔구나,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들어가며 친해지기 시작하던, 그때 그 느낌과 비슷했다. 입시라는 긴 터널을 통과해서 캠퍼스의 낭만을 나눴던 것처럼 인생이라는 터널을 통과하고 다시 만났다.
누군가 기타를 하나 가져왔고, 댄스뮤직 위주의 아이돌이 출몰하기 전에 감수성이 완성되었던 세대답게 발라드 메들리를 이어갔다. 주최 측에서 ‘펜션나이트’를 준비해 주었지만 낮에 계곡에서 기운을 뺀 탓인지 우리의 여흥은 발라드에서 멈췄다. 아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로 공통점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공감할 여지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친구를 만난다는 게, 이 나이에는 쉽지 않은데, 참 복된 인연을 뭉텅이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모임을 기획한 입장에서 서로 배려하고 궂은일에 나서는 사람이 많아 참 편안하게 마칠 수 있었다.
선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50대가 되면 인간관계에 신규투자를 잘 안 하게 된다고. 유지보수 비용만 들여서 현상유지만 한다고. 이를테면 송년회에는 참석하거나 상가집 빈소에 방문하는 정도로, ‘우리 앞으로도 계속 아는사이로 남읍시다’ 제스처를 취하는 정도로 멈춘다고. 인간관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수중전 다 겪어보고 난 뒤 부질없이 관계에 집중하는 것의 영양가 없음을 나름 타득한 뒤, 대부분 ‘이제 아는 사람한테나 잘하고 살자’고 셀프 결론에 도달한다고.
젊을 때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고, 관계맺기에 웃고 울던 때의 적극적 태도는 잃고, 이제 새로운 사람에게 괜히 돈과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방어적 태도가 되는데, 30주년 준비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인맥보다는 인연의 영역이고, 공유하는 것과 지향하는 것이 일치하고(마치 같은 팀을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들어선 사람들처럼…), 배신 당하고 상처받고 이용당할 여지가 적은 그룹이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무엇보다 너무나 바삐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내가 빠뜨린 무언가를 다시 챙기는 기분이 드는 모임이니.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처럼 모임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임의 텐션이 유지되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처음 모임을 시작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멤버를 모두가 팔 벌려 환영하고, 모임의 부흥을 위해 너나없이 리소스를 쏟아붓는 시기가 있는데 이 모임은 지금이 딱 그 시기다. 이때가 지나면 여러 가지 지뢰가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하면서 모임이 와해되기 시작하는데 지금 이 시기를 서로 잘 즐기면 좋을 것 같다.
친구들의 인생에서 평범한 위대함을 보았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체득한 어른. 부와 명예와 권력과 인기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 때문에 어른이 아니라 '어른이'로 살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 두니까. 모두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해 안달이니까. 배려받는 게 당연한 것이 되어서,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버릇이 되고. 기자 그만두니 그런 '어른이들'의 어리광을 안 만나서 좋았다.
'어른의 여행 & 스테이 클럽/트래블러스랩'을 처음 기획할 때는 그 시절 X세대 신세대로 불리던 이 친구들이 잠재적 대상이었다. 그런데 실제 여행을 진행해 보니 은퇴한 1차 베이비붐 세대가 주력이었다. 우리는 2차 베이비붐 세대인데 아직은 다들 바빴다. 1차 베이비붐 세대와 예습한 여행을 2차 베이비붐 세대인 이 친구들과 복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