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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05. 2023

세상에서 가장 슬픈 교가, 하지만 철학적

가파초등학교 교가

가파도에 가면 꼭 가파초등학교에 가보고, 가면 꼭 교가를 찾아보길 권한다. 교가는 이렇다.


‘아침이면 붉은 해가 바다에서 뜨고/ 저녁에도 붉은 해가 바다에 지는/ 가파도는 남쪽 바다 외딴섬이나/ 우리들은 슬기로운 가파 어린이 (…) 보이는 건 넓고 넓은 하늘과 바다/ 일 년 내내 바닷바람 세차게 불어/ 나무들도 크지 못하는 작은 섬이나/ 우리들은 부지런한 가파 어린이….’


이렇게 팩트에 충실한 교가가 있을까? 이렇게 니힐한 교가가 있을까? 이렇게 자조적인 교가가 있을까? 냉철한 현실 인식 뒤에 달관한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보통의 교가들은 어디어디 정기 받아서 변강쇠가 되자며 마무리 되는데 이 교가에서는 그냥 슬기롭게, 부지런히 살자 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신독’의 경지다.


 '000이나'라는 표현은 웬만해선 교가에 쓰지 않는 표현이다. '현실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기로운 어린이가 되고 부지런한 어린이가 되자고,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단정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고, 가련한 꽃이 되자고 한다.



국토 최남단을 기점으로 순위를 매기면 마라도는 1등, 가파도는 2등이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랫동안 가파도(제주 서귀포시 대정읍)는 잊힌 섬이었다. 사람들이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가서 영역 표시(주로 짜장면을 시켜 먹는 곳으로)를 하고 올 때도 가파도는 그냥 보일 듯 말 듯 지나치는 섬이었다. 그렇게 가파도는 ‘외로운 섬’이었다.


그런 가파도가 재평가된 것은 청보리축제 덕분이다. 이후 ‘탄소 제로’의 슬로시티로 변하면서 힐링 관광지로 인기를 얻었다. 제주올레도 번외 편인 10-1코스를 이곳에 조성해 가파도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외롭고 낮고 쓸쓸한 섬 가파도는 그렇게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정기선을 타고 들어간다. 배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모슬포 앞바다는 예전에 ‘못살포’라고 불렸을 만큼 풍랑이 거세다. 가파도에 배가 정박하는 곳이 상동선착장인데 제주도 본섬이 보이는 이곳과 마라도가 보이는 반대쪽 하동에 주로 주민이 거주한다(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집도 반대쪽에 있다).


가파도 걷기는 제주올레 10-1코스를 따라서 걷는 것도 좋지만 길 표지판과 관계없이 상동선착장과 반대편 하동 쪽을 왔다 갔다 하며 지그재그로 걷는 것도 좋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혹은 파도가 부르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왜? 가파도에서는 절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까.


가파도는 마라도와 질감이 많이 다르다. 분지 지형처럼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마라도는 시야도 높고, 바람도 거세고, ‘국토 최남단을 걷는다’는 생각에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반면 가파도는 고요하고 겸손하다.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20m를 약간 넘을 뿐인 가파도는 손등 모양의 완만한 지형이다. 특히 하동 쪽 보리밭에 부는 미풍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가파도를 걸을 때는 시계를 풀어놓고 걸어야 제맛이다. 시간이 멈춘 이 섬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은 바로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면 이 섬은 한없이 싱거워진다. 무언가를 목표로 세우기에 이 섬은 너무 작고 낮다. 조바심을 낼 이유가 없다. 너무 성큼성큼 걸으면 이내 섬 한 바퀴를 다 돌고 만다. 그러면 가파도는 싱거운 섬이 된다. 시계를 풀어놓고 속도를 늦춘 채 간질간질한 바람의 은근한 건드림과 확 트인 시야가 주는 시원한 눈맛을 누려야 한다.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든든한 두 개의 표지판이 있다. 바로 마라도와 한라산이다. 아득히 보이는 마라도를 바라보고 걷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제주도의 산들을 바라보며 걸으면 된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도 거의 없고 집도 나지막해 전망이 좋다. 제주도에는 오름이 아니라 ‘산’이라 불리는 곳이 한라산•산방산•송악산을 비롯해 여덟 곳이 있는데 이 중 일곱 곳이 가파도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가파도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면 울퉁불퉁해 보인다.



가파도는 이제 슬로시티, 청정섬으로 지정되어 차량이 통제된다. 주민 차량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것도 곧 전기차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전기선을 땅에 매립하는 공사를 진행해 전봇대 없는 섬이 되었다. 나무도 거의 없고 전봇대마저 없어서 눈이 편안하다. 골프장 카트가 질주하는 마라도와 스쿠터가 설치는 우도와 달리 가파도는 귀를 괴롭히는 탈것이 적다.  


모슬포와 가파도 사이 바다는 파도가 세차서 해산물이 맛나다고 알려져 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 척박한 바다는 맛난 해산물을 선물한다. 가파도에서 전복성게죽을 먹었다. 전복 내장이 아니라 성게알을 써서 색이 노랬다. 전복은 내장을 제거하고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전복의 식감과 성게의 색감을 살린 죽이었다. 이런 해산물들은 물때가 따로 있어 얼려두고 먹는데 얼린 것이라고 얕잡아볼 것이 아니었다. 좋은 해산물은 얼었다 녹아도 맛이 여전했다.


가파도 해안길을 걷다 보면 바닷가에서 해녀 할망이 잡아온 소라를 깨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무척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 풍경은 ‘고독’과 ‘사랑’으로 나뉜다. 부부가 함께 작업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훈훈하다. 할아버지는 망치로 소라 껍데기를 깨고 할머니는 알맹이를 꺼낸다. 이 작업을 혼자 하는 할머니는 돌로 껍데기를 깨고 알맹이를 꺼낸다. 이 모습은 고독하다. 집에 가지고 올 때도 할아버지가 지고 오면 할머니가 구부정하게 뒤따르는 집이 있고 할머니 혼자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 집이 있다. 그 뒷모습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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