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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10. 2021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여행을 배우다

다큐멘터리 연출가는 저널리스트이면서 환경생태학자이면서 문화인류학자다

<최후의 툰드라>

 

10여 년 전 한국 다큐멘터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심야 시간대에 방송하고도 20%가 넘는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아마존의 눈물〉은 가히 ‘다큐돌’이라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다. 트위터를 통해 팬클럽 모임이 열리고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그중에는 대기업 CEO도 있었다.      


오지 여행을 기획할 때 현지 다큐를 제작한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의지하곤 한다. 현지 사정 설명을 듣고 코디네이터를 소개받는다. 다큐를 제작할 때처럼 깊이 파고들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여행을 짜면 보통의 여행과는 다른 밀도 있는 여행을 진행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다큐의 특징은 ‘한국인의 시선으로 현지인과 교감한다’는 것이어서 현지 컨택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 연출가들은 저널리스트이면서 환경생태학자이면서 동시에 문화인류학자가 되어야 한다. 여행감독의 역할도 비슷하다. 볼거리 할거리 먹을거리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여행을 만들 수는 없다. 그 이상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무례하지 않으면서 주저하지도 않으며 현지인에게 손을 내미는 스킬도 필요하다.      


한국형 다큐 이야기로 다시 들어가서, 2009년은 한국 다큐멘터리 발전의 티핑 포인트가 된 해였다. 〈아마존의 눈물〉이 텔레비전에서 대박을 냈고, 극장에서는 〈워낭소리〉가 300만 명 넘게 관객을 끌어모았다. 〈철까마귀의 날들〉은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중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한 한 해였다.     


HDTV 시대의 개막과 블록버스터 자연 다큐멘터리의 전성기가 함께 열렸다. MBC 〈북극의 눈물〉과 〈아마존의 눈물〉의 성공에 자극받은 KBS와 SBS도 대형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물이 안방극장을 풍성하게 하며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SBS 〈최후의 툰드라〉를 시작으로 MBC 〈아프리카의 눈물〉에 이어 KBS 〈동아시아 생명 대탐사, 아무르〉까지 방영되었다.      


다큐 삼국지의 서막을 연 〈최후의 툰드라〉는 SBS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그동안 ‘KBS는 문명사를, MBC는 인간사를, SBS는 관심사를 다룬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다큐멘터리에서만은 SBS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창사 20주년 기획으로 제작된 〈최후의 툰드라〉는 회심의 역작으로 매회 10% 이상 시청률을 기록했다. DSLR 카메라로 찍은 선명한 화면은 시청자들의 ‘북구 로망’을 자극했다.     


<최후의 툰드라>


〈최후의 툰드라〉에서 특히 시청자를 잡아끈 것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이 작품을 제작한 장경수 PD는 “툰드라는 자연 그대로가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좋다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땅이다. 그 동토의 땅에 깃든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을 가슴으로 담아냈다.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제 몫을 해냈다. 철 안 든 어른보다 나았다. 그 아이들 사이의 ‘형제애’에 주목했다”라고 설명했다.     


〈최후의 툰드라〉 제작진은 촬영 현장에 들어가서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주특기인 들이대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단 들이대서 촬영 대상과 교감하는 것에는 한국 연출자들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폐를 끼치더라도 파고들어 서로 정을 나누며 대상과 합일을 이뤄내는 방식은 이번에도 통했다. 장 PD는 “우리는 그들에게 애물단지였다. 유일하게 제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먹을 것과 잘 것과 이동을 모두 그들에게 의존했다”라고 말했다.     


무작정 들이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장 PD는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을 안아줬다. 어떤 날은 촬영 없이 함께 일만 하기도 했다. 관찰자가 아니라 그들의 동료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다른 다큐 제작자들과 한국 제작자는 다르다고 했다. 형제 같다고 했다. 이제 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심했다”라고 돌이켰다.     


현지인들과 나누는 친교는 해석의 깊이를 더해준다. 〈북극의 눈물〉과 〈아마존의 눈물〉 제작진이 현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비결도 이런 스킨십에서 나왔다. 〈아마존의 눈물〉을 연출한 김진만 PD는 “현지인 또한 관찰자다. 그들도 우리를 관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마음껏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몸을 만지고 싶으면 만지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쓰다듬게 했다. 그러자 경계를 풀었다”라고 말했다.     


장경수 PD도 현지인들에게 관찰을 당하곤 했다. 마을 촌장에게 ‘인터뷰’를 당하는 역경험을 하면서 단순히 그들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 그리고 그들의 철학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장 PD는 “촌장에게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렇게 사고의 폭이 넓고 깊어질 수 있구나. 사람 마음속에 바다가 깃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평했다.   


겨울 난로 같은 〈최후의 툰드라〉가 끝날 무렵 등장한 〈아프리카의 눈물〉은 여름 부채 같은 선선한 매력을 선사했다. 그러나 MBC 다큐 팀에 따라붙는 징크스는 여전했다. 〈북극의 눈물〉 제작 때는 조연출이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고, 〈아마존의 눈물〉 때는 보트 전복 사고로 제작진이 강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던 MBC 

〈지구의 눈물〉 시리즈 제작팀은 아프리카에서도 역시나 사고를 몰고 다녔다. 갑자기 부족민들이 총기를 난사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코끼리가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기도 했고, 차량이 세 바퀴를 굴러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총격을 피해 급히 자세를 낮춘 <아프리카의 눈물> 제작진


아프리카의 ‘눈물’은 북극의 눈물과 아마존의 눈물보다 깊고 처절했다. 그들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 지구온난화에 의해 그 누구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의 와중에 서로를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 모습은 만감을 교차하게 만든다. 그 눈물을 진솔하게 담아낸 〈아프리카의 눈물〉은 이제 우리의 다큐멘터리 제작 실력도 사람과 문화와 자연을 총체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말 그대로 MBC 다큐멘터리 혹은 한국형 다큐멘터리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MBC 다큐멘터리는 휴먼 다큐멘터리의 전통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북극의 눈물〉과 〈아마존의 눈물〉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휴먼 다큐에 가깝게, ‘북극인의 눈물’ 혹은 ‘아마존인의 눈물’이라는 콘셉트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눈물〉은 정통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아프리카의 현실인 총과 피를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 것에 대해 장형원 PD는 “성공의 길이 보이는데, 다른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현실을 피하고 판타지를 좇을 수는 없었다.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지구의 눈물’ 시리즈 전작과 함께 〈아프리카의 눈물〉이 뛰어넘어야 할 벽은 세계 유수의 방송사들이었다. 한학수 PD는 “어디를 가나 BBC와 부딪쳤다. 북극에서도, 아마존에서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도. 아마 그들도 이제 우리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보았다. ‘얼마나 더 오래 버티나, 얼마나 더 깊숙이 들여다보나’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눈물>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전 시리즈에 비해 〈아프리카의 눈물〉은 현재의 비극에 주목했다. 한 PD는 “모든 것을 지구온난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구가 온난화하는 데 가장 적은 잘못을 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역설을 고발하고 싶었다. 감정은 자제했다. 그래서 편집할 때도 철저하게 절제했다. 내레이션 양도 줄였고, 음악도 최소한으로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밀착형 취재는 고수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내밀한 드러내기를 통해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 PD는 “풀라니족 여성들의 입술 문신은 임신 가능한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과의례다. 이런 장면은 수치스러움 때문에 남성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외간 남자에게는 더더욱 허락하지 않는다는데, 우리에게는 예외로 허락해주었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눈물〉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구실을 충실히 해냈다. 한 PD는 “우리에겐 이상해 보이는 사소한 행동도 다 이유가 있고 맥락이 있었다. 조예족이 입술을 뚫어 뽀뚜루를 끼우고 다니듯, 수리족 여성들은 입술을 찢어 진흙 원반을 끼우고 살아간다. 그런 치장에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동아시아 생명 대탐사, 아무르〉


SBS 〈최후의 툰드라〉와 MBC 〈아프리카의 눈물〉의 대항마로 KBS는 〈동아시아 생명 대탐사, 아무르〉를 선보였다. 〈유교 2500년의 여행〉 〈차마고도〉 〈인간의 땅〉 〈누들로드〉 등 ‘인사이트 아시아’ 시리즈를 통해 주로 문명사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던 KBS도 자연 다큐멘터리로 선회했다.     


지금은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만 해도 DSLR 카메라로 찍는 게 드물었는데, 질감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광록 PD는 “러시아와 중국 접경 지역인 아무르 강 유역은 촬영이 어려웠다. BBC나 내셔널지오그래픽도 아직 다루지 않은 곳이다. 항공 촬영 때문에 러시아 정보기관에 취조를 당할 만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충분히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내가 연출하는 ‘어른의 여행’이 다큐로 제작될 날을 꿈꿔 본다. ‘수고하고 짐 진 도시인’들에게 여행이 무엇을 선사할 수 있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중년에 깨워야 할 세포는 연애 세포가 아니라 여행 세포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질문과 답을 준다. 


<최후의 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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