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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un 18. 2021

진중권과 청부논쟁업자의 시대

보수 궤멸의 전주곡, 김내훈의 <프로보커터>를 읽고...

  

# ‘청부논쟁업자’의 시대     


‘논객–옳고 그름을 논하는 나그네’의 시대에서 ‘청부논쟁업자’의 시대로 바뀌었다. <프로보커터>의 저자 김내훈은 대표적인 프로보커터(도발하는 사람)였던 ‘아모스 이의 삶과 죽음’을 들려주면서 ‘진중권이 왜 그렇게 되었나’를 이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변희재와 지만원의 이름을 넣어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주류 언론에 소개되지 않는 논객의 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논객의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수치화된다는 점이다. 논객이 팬덤을 의식할 때, 특히 논객이 돈이 되는 팬덤을 의식할 때 그리고 언론사가 돈이 되는 팬덤을 가진 논객을 의식할 때 공론장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우리는 지켜보았다.       


진중권이 프로보커터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은 변희재가 그렇게 되었던 과정과 일치하고 그것은 또한 지만원이 그랬던 것과 같은 구조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에 사람들이 동의하고 팬덤을 형성한다. 그리고 팬덤은 그들의 물적 기반이 된다. 그리고 분노사회에서는 팬덤의 감정을 대리하는 것이 더 큰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팬덤의 감정을 대리 배출해 주면서 그들은 ‘청부논쟁업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진중권의 성공적인 보수진영 안착은 신지예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진보판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몸값을 대선 국면을 활용해 천정부지로 높이고 진보의와 페미니즘의 핵심 기술을 이전할 것인양 윤석열 캠프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토사구팽 되었지만.       



# 침묵하는 다수 vs 행동하는 소수, 마중물이 되는 팬덤

    

‘사일런트 메이저리티’ 말고 ‘샤우팅 마이너리티’가 있다. 실재로는 소수가 공론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먼저 반응해야 SNS의 알고리즘이 그 주장을 비중 있게 전파해 주기 때문이다. 트위터에서 리트윗 해주는 사람이 중요하듯 SNS에서 즉각 전파해 주는 그룹이 중요하다. 국정원의 트위터 조작도 이런 방식이었다. 초기의 조작이 2차 3차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등장하던 시기는 이명박근혜 초기로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했던 시기다. 이명박정부의 언론 장악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던 때라 대안 언론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 시기 ‘언론이 보도할 때 트위터는 행동한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트위터 유저의 양상이, 특히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중요했던 시기다. 행동의 방식 중에는 ‘온라인 전파’가 있었고 그 방식은 제법 유효했다.       


그런데 논객과 팬덤이 ‘의견의 일치’로 형성되던 것이 ‘감정의 일치’로 점차 바뀌었다. 사회가 감정적인 골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샤우팅 마이너리티’가 반응하고 논객들이 팬덤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역치 이상의 자극을 주어야 한다. 감정의 대리 배설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팬덤은 더 과격한 목소리를 내는 ‘신상 청부논쟁업자’를 찾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 적을 규정하는 능력      


‘청부논쟁업자’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적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새로운 적을 규정하면서 새로운 스타가 등장한다. 이 능력이 중요해진 것은 갈라진 사회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회가 갈라진 뒤에는 이제 승부만 남는다. 그래서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메시지가 겨냥하는 방향이 중요해졌다. 달이 아니라 손가락이 주목받는 사회가 된다. 메시지의 깊이보다 퍼포먼스의 방식이 중요해진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지역 혐오다. 사실 모든 혐오는 지역 혐오의 변종이다. 기본적인 혐오의 문법이 동일하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그들 탓으로 돌리고 혐오를 정당화한다. 지역 혐오를 정치인들이 이용했듯이 성소수자 혐오와 여성 혐오 역시 정치인들의 새로운 동력이 된다. 이런 혐오 발화로 청부논쟁업자는 인기를 얻고, 미디어는 장사를 하고, 정치인은 표를 얻는다. 

  


# 어그로코노미(어그로+이코노미) 

     

이제 청부논쟁업자들은 ‘관심 자본’이 있는 곳으로 금을 캐러 간다. 장이 서면 그들은 바람보다도 빨리 일어선다. 유튜버들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이 장에 멍석을 깐다. 그러다 보니 맥락이 사라졌다. 전부 갑툭튀다. 이슈의 앞뒤 맥락도 없고 논객의 맥락도 없다. 그저 장이 서면 몰려들 뿐이다.      


논객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이 비전문가라도 주목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의 통찰력을 존중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 객관적이고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기대를 갖기 힘들어졌다. 청부논쟁업자들이 진영을 대리해서 싸우고 있을 뿐이다. 


“선악을 떠나 시선을 끄는 행위 자체가 경제 활동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중략)... 주목과 관심에 환금성이 부여되는 주목경제의 시대”(26쪽)     



# 이슈의 야시장에 뛰어든 레거시 미디

    

이 야바위판에 레거시 미디어도 뛰어들었다. 정확하게는 ‘어그로코노미’의 맛을 알아버렸다. 미디어가 이슈의 야시장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K리그 선수가 조기축구에 기꺼이 뛰어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기축구에 와서는 오프사이드를 무시한다.      


“언론은 늘 그들에게 입을 빌려줄 새로운 스피커를 찾고 있으며, 검증이나 반박이 불가능한 어그로성 게시물들을 언제든 인용 보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224쪽)        


레거시 미디어는 시정잡배의 화장실 낙서와 같은 말을 비중 있게 인용한다. 그런 인용을 통해 언론은 논증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의무에서 자유로움)을 누린다. 그런 것을 비중 있게 보도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다. ‘일반인의 목소리도 존중하는 언론’이라며.      


세월호 참사 때 홍가혜 사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재판 결과, 홍가혜의 인터뷰 내용보다 홍가혜에 대한 언론 보도에 오보가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가혜의 인터뷰가 부정확했다면 처음부터 홍가혜를 인터뷰한 미디어의 잘못을 함께 물었어야 했다. 그 당시는 미디어도 오보를 쏟아내던 국면이었다. 일반인이 파악한 사실 관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반인인 홍가혜에게 덮어씌우기를 했다. 

     


# 이슈의 우물에 독을 풀었던 <조선일보>     


2020년 신문지면에 진중권을 가장 빈번하게 호명한 언론사는 조선일보였다. 1년간 1000회 정도를 인용했다는 것(하루 3회)은 밥 먹고 똥 싸는 것 빼고는 다 받아 적었다는 얘기다. 마치 조선일보 전속 논객처럼 활용했는데, 진중권이 그 정도 인물인가?      


“보도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게시물을 인용한 ‘진 전 교수 가라사대’는 비평을 일개 밈으로 격하하는 것이다. 보수언론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중권을 차도삼아 휘두른다.”(220쪽)     


조선일보의 ‘보수의 미네르바’ 발굴 게임은 일반인으로 확산된다. 그래서 ‘좌은산, 우삼호’를 호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언론사들은 여전히 조선일보를 따라 한다. 조선일보가 픽하니 다른 언론사들도 픽한다. 우리 언론은 예전에도 자존감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이런 메카니즘에 의해 프로보커터들은 한국 사회의 만신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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