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촐한 단칸방 살림.
벽을 뺑둘러 놓인 책장.
책들 그리고 책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아버지는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난 종종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 겨드랑이 틈 사이를 머리로 파고들었다.
그럼 아버지는 책을 잠시 한 켠에 두고,
나를 두 손으로 잡아들어 두 발 위로 올려 ‘비비-두 발로 태우는 비행기놀이’를 태워주셨다.
깔깔깔 내 웃음소리.
껄껄껄 아버지 웃음소리.
2.
엄마는 작은 몸으로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니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떼다 방문판매로 아줌마들에게 팔았다.
결국 보따리 장사로 밑천을 마련했고, 전통시장 안에 작은 수입품 가게를 차렸다. 가게 이름은 맏이인 형 이름으로 '00이네'라고 지었다.
가게 이름을 왜 형 이름으로 했는지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나보다 형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세상엔 둘째는 가게 이름이 될 수 없는 암묵적인 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3.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그 시절 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으니, 아무래도 적당한 직업이었다. 군복을 입은 아버지는 늠름하고 멋져 보였다. 한 번은 아버지를 따라 형과 나는 군대를 방문했다. 군인 아저씨들이 아버지께 경례를 할 때, 괜스레 내 마음이 우쭐대는 것이 느껴졌다. PX에 들어가 과자를 한 아름 샀다. 형과 나는 과자를 입으로 우물거리며 군인 아저씨들과 함께 공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버릇이 없었다. 굳이 있다고 말하면, 술에 취하면 자는 것. 그것이 술버릇이었다. 한 번은 집에 아버지 친구분이 찾아왔다. 엄마는 솜씨 좋게 술안주를 금세 만들어 앉은뱅이 밥상에 올렸다.
난 아버지 옆에 앉아 어른들 말을 주워들었다. "애들은 못 알아들어. 괜찮으니 이야기해" 아버지가 말했고, 친구분이 한 참을 하소연했다.
어느덧 술 한 병이 두 병이 되었고, 아버지는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00 아버지 일어나 봐요."엄마가 아버지를 흔들었지만 아버지는 까무룩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엄마에게 "왜 아버지랑 결혼했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할머니를 때렸어. 큰 삼촌 작은 삼촌이 말리고 큰 이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 집안에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 같아. 근데 너네 아빠는 술 마시면 그냥 자는 거야. 그래서 이 남자면 되겠다 싶었지."라며 웃으며 말했다.
4.
네 가족이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와 아버지는 각자의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하늘을 걷는 듯 부모님 손에 매달려 깔깔 거리며 날아올랐다.
형 한 번, 나 한 번.
5.
아버지는 없다.
당시 어른들 아니 학교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결손가정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결손가정 아이가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사라진 이유를 간명하게 말했다. "아빠는 다른 여자가 생겼어."
엄마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뱉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오로지 내 몫이 된 것만 같았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야' 난 마음속으로 외치며 결심했다.
6.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내 손에 책이 들려있다. 책을 읽고 있다. 책은 날 빨아들인다. 책은 친구 같고, 엄마 같고, 누나 같고..... 형 같고.....
7.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내 손에 소주잔이 들려있다. 술을 마신다. 술은 날 잠으로 빨아들인다. 술은 친구 같고, 엄마 같고, 누나 같고..... 형 같고.....
8.
삼십 대 중반 어느 날.
거울 속 내 모습.
내 안에,
내 모습 안에.
그가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있다.
내 삶의 시작.
그리고 과정.
끝까지.
아마도.
그는 나와 언제나 함께.
였었고, 였고, 일 것임을.
알았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