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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조

by 윤한솔

2017년, 친구와 템플스테이를 갔던 때의 일이다.

짐을 풀고 환복을 하고 다과시간을 가지며 질의응답을 했다.

그때 스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혜안을 가진 이라 여겼고 우문에도 현답을 줄 것 같아서 물어보려 했지만,

부끄러움 때문에 나는 끝끝내 질문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물어보려고 했던 것은,

'스님은 본인 스스로를 사랑하시나요?' 였다.

입가에 내내 맴돌던 그 질문을 하려던 걸 보면

그때 당시에 내가 나를 지독히도 미워하고 있었구나 싶지만

비단 그때 뿐만은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한 평생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것.

누가 그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고장나도 단단히 고장 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이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소개했을 때

좌중의 당황한 표정을 이끌어 낼 만큼의 나쁜 사람이라면,

그때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남을 기만하고 우습게 여기고

자만이 가득 차서 다른 것이 들어올 공간을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다지도 최악이며 절대 드러날 정도로 선을 넘지 않는 악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서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내가 누구인지 탄로 날까 두려워했다.

어쩌면 정체랄 것도 없는 사람이면서도.

그래서, 내가 나라서, 상대의 마음이 옮겨 가버릴까 봐 부지런히도 두려워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경계는 늘상 모호하고,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해도 그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잘하지도 못하는 계산을 하며 관계를 꾸려 나가다 보니

결국 먼저 지치고 힘든 쪽은 내가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힘들게 했으니 원망할 것도 없다.

도망쳐 숨을 곳도 없다.


모든 감정의 원동력은 나를 갉아먹는 것에서 비롯되니

더 이상 낮출 나 자신도 없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

사랑받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욕심이 이렇게나 힘들다.

그러다보니 상당히 찌질한 것을 고수하며 살고 있으며

마음도, 다른 것을 보는 시선도 굉장히 협소해진다.

안정된 관계 속에서 심술을 부리지 않고

집착도 하지 않으며 상대를 긁지 않으려

애먼 나만 구멍 날 정도로 벅벅 긁어대는 꼴이라니.


어떤 것도 의지가 들지 않고 그저 무기력하다.

특히나 건강하고 건설적인 것들은.

기분과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그것들은 오랜 기간 동안 변치 않는 확고한 리스트라서

이젠 진부하게까지 느껴진다.

이겨낸 사람들은 이겨냈으니 이겨낸 사람인거다.

뭐가 어땠든 저땠든 간에

'이겨냄'이라는 것까지 설정되어 있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 세팅 값이 아닐 테고.


세상은 이렇듯 너무나 무겁고 버거워서 주변을 둘러볼 여력조차 없이

내 아픔에만 최선을 다해 중점을 맞춘다.

이럴 때 하라고 있는 최선은 아닐 테지만, 아무튼. 꽤나 열심이다.

스스로 단단할 줄 몰라서 아무데서나 주운 깡통 같은 것을 이고 사는

제 집 없는 소라게 같은.

무척이나, 개 같은.


원하는 내가 있지만 원하는 내가 될 수는 없고,

무엇인가를 욕망하지만 그것은 내가 나인채로는 가질 수 없기에,

그렇다고 굳게 믿기에,

미운 내가 더 미워지는 것.

그런 탄식이 깊어지고 짙어지는 밤과 밤과 밤과 밤과 밤과 밤들.


그러나 그 밤들은 길고

왜인지 모르나 기필코 버텨내야 하니

의식을 잃은 채로 죽은 듯 누워 있다가

다음날 아침 알람에 눈을 뜨면

'역시나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군.' 이라고 읊조리며

스스로를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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