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한가운데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에우로파>를 읽었다. 큰 충격으로 이혼한 여자와 여장하는 남자의 우정인지 사랑인지 흐릿하고도 오묘한 산책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에우로파>라는 시가 짧게 나왔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 볼 수 없을 차가움
5줄 남짓한 문장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나는 "에우로파"라는 생소한 단어와 목성에 달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애초에 목성의 달 따윈 평생 생각해 본 적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차가운지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실에 혼자 얇은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내 몸의 서늘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추워진 겨울의 기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잠시 접어두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베란다 쪽을 바라봤다. 커튼 봉에는 젖어있는 흰 티셔츠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정적이고도 근엄한 자세로 서있는 녀석들이 우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왜, 아까 빨래 널었을 때는 몰랐을까." 그 광경을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바라봤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모노노케 히메> 영화 포스터가 담긴 티셔츠, 검정치마 3집 앨범 표지가 담긴 티셔츠, 아무것도 없이 깔끔한 티셔츠. 모두 나를 나타내고 있었다.
<모노노케 히메> 영화를 좋아하는 나를.
검정치마 노래를 좋아하는 나를.
훼손되지 않는 순백을 좋아하는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들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세 개의 티셔츠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목이 늘어나고, 해지고, 누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르지 않은 흰 티셔츠의 차가운 여백을 도화지 삼아 에우로파를 상상했다. 작은 목소리로 "에우로파, 에우로파...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 볼 수 없을 차가움..." 을 내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