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다. 썩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쓰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스스로 맘에 들지 않으면 절대 완성할 수 없다. 만화와 글을 쓰면서 생각이 딱 막힐 때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풀리지 않는 건 절대 풀리지 않는다. 반대로 신들린 사람처럼 막힘없이 써 내려갈 때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쭉쭉 써 내려간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그런 기분을 느낄 때면 나 자신이 정말 뿌듯해진다. 살다 보면 그런 경험은 일상에서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4년 전, 나는 웹툰작가를 꿈꿨다. 만화를 잘 그리는 방법은 단순했다. 그냥 만화를 많이 그리면 된다. 하지만 게으른 완벽주의자 같은 성격 때문에 도저히 웹툰 원고를 완성할 수 없었다. 웹툰의 그림 퀄리티도 높아야 하고 분량도 많아야 했는데 나는 잘 풀리지 않을 때 도피해 버리는 나쁜 버릇 때문에 완성하는데 더 오래 걸렸다. 그래서 완성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내팽개쳐버린 원고가 많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작품 준비를 했었는데 쉽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이 모든 걸 이겨내야 했는데 나는 나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나에게 우리 삼 남매를 인스타툰을 그려보는 게 어떻게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뭐 한번 해보지'라는 마음으로 인스타툰을 그려봤다. 처음 그리는 거라 어색했지만 어찌어찌 완성했다.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가 즉석에서 바로 뚝딱 완성되는 걸 보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몇 번 그려보니 인스타툰이 장기전이 약한 나에게 딱 맞았다. 그때 시작한 첫 단추가 지금까지 3년도 넘게 계속 그리고 있는데 이제는 인스타툰을 그리지 않는 내가 어떻게 지냈을지 모를 정도로 인스타툰에 대한 애정이 가득해졌다.
나는 인스타툰을 그릴 때 미리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올리는 내용을 그린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드는 글이 있다. ‘이걸 그려야겠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글들이 딱 떠오르면 바로 구상해서 그리는 편이다. 한 편을 그리는데 보통 6시간 정도 걸리는데 주말에 바짝 집중하고 묵묵히 그리다 보면 만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기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에서 그림과 글로 채워지는 모습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는 모습과 닮았다.) 혼자 태블릿 앞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하다가 마침내 완성했을 때의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세상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스럽고 뿌듯해진다. 이렇게 자기애를 강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만화를 그리는 게 누가 요구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완성하겠다는 진취적인 태도 때문이다. 만화 모든 것이 전적으로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의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없는 거 같다.
생각을 만화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만화가 아닌 온전히 글로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상 글을 써보니 내 생각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글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일기를 많이 썼다고 자신만만했는데 누가 읽는다는 그 차이 하나만으로 글을 쓰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하려고 한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만화와 글로 표현하여 세상에 내놓는 게 너무나도 맘에 든다. 그건 아주 멋진 일이다. 내 마음속 한 구석에서 그걸 강하게 원하고 있는 그 작은 불씨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