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지하철에서.

by 고순

인천행, 인천행 열차가 들어옵니다. 내가 내리는 역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리기에 나는 무조건 앉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다음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역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배차간격이 실패한 열차에는 자리가 많았다. 내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의자 앉기 게임을 하지 않아도 앉을 수 있었다.


열차는 서울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일요일 오후 5시의 평온함도 함께 느껴졌다. 갑자기 내 등 뒤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나를 껴안은 것이다. 이 자리를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항상 지하철에 앉을 때면 태양이 들어오는 자리에 앉았다.


"태양을 온전히 받고 있는 화단에 있는 기분이야. 어쩌면 나는 식물일지도 몰라. "


화분이 된 것 같은 감수성은 이내 사라졌다. 이건 사실 확증편향이기 때문이다. 열차를 무수히 많이 타온 내가 늘 태양이 닿는 자리에 앉았을 리가 없다. 태양을 찾아 고개를 기울이는 꽃들의 기쁨과 다르게 나는 사실 뜨거웠다.


할 게 없던 손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나는 휴대폰은 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변을 관찰하기에는 정신이 몽롱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열차와 동기화된 몸은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였고 정신은 자는 듯 만 듯 한 오묘한 상태가 되었다. 무슨 꿈도 꾸지 않은 나는 컴퓨터 휴지통에 잔뜩 쌓인 쓰레기를 마우스로 하나씩 지우는 것처럼 잡생각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게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잡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내 옆 사람에게 쿵 하고 기대 나는 화들짝 놀랐고 고개를 숙여 옆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기를 한 번 더 반복하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3번까지는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잠 덕분에 몽롱함은 조금 사라져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열어 <디 에센셜 김수영> 이북을 꺼내 읽었다. 책을 펼쳐 시집을 몇 개 읽었지만 난해한 느낌이 들었다. 폭포처럼 직관적으로 와닿는 시도 있었기에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몸은 휴대폰을 보고 싶지 않다면서 또 싫증을 부렸다. 손목에 느껴지는 미세한 뻐근함이 불쾌해 나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놨다.


할 일 없는 눈은 주변으로 시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내 옆 사람뿐만 아니라 건너편 구석지에 앉은 사람도 반대편 중간에 앉은 사람도 단잠에 취해있었다. 입꼬리만 봐도 편안해 보이는 무해한 얼굴로 잠을 자는 사람들, 아까 나처럼 똑같이 몸을 아슬하면서도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다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중인 걸까. 저녁 먹으러 집에 가는 걸까."


자는 사람은 말이 없고 서 있는 사람도 말이 없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뒀다. 관조적인 태도에 심취한 나와 반대로, 열차는 늘 그랬듯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며 일요일 저녁을 향해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2화이로운 존재는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