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지만 나는 빠져나왔다.
팀장이 "왜 안 와?"라고 물었고, 나는 "개인 약속이 있어서요"라고 거짓말했다. 개인 약속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가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역에서 내렸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셈이었다. 여섯시 반. 거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퇴근하는 사람들, 약속 장소로 가는 사람들, 저녁을 사러 가는 사람들.
나는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빨리 걸었다. 빨리 걸어서 빨리 집에 가서 빨리 씻고 빨리 누워야 했다. 내일을 위해서. 하지만 오늘은 천천히 걸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서점 앞을 지나갔다. 큰 서점이었다. 들어가본 지 오래됐다. 예전에는 자주 갔었다. 대학생 때는 거의 매주 갔었다. 신간 코너를 둘러보고, 관심 있는 책을 집어 들고, 뒤표지를 읽고, 목차를 훑어보고, 첫 페이지를 펼쳐보고. 때로는 사고, 때로는 그냥 나왔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 냄새가 났다. 종이 냄새, 잉크 냄새. 익숙한 냄새였다. 오래된 기억 같은 것.
신간 코너로 갔다. 예전처럼 책들을 둘러봤다. 소설, 에세이,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 표지들이 화려했다. "당신의 인생을 바꿀", "성공하는 사람들의", "행복해지는 방법". 나는 아무것도 집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갔다. 문학 코너였다. 사람이 적었다. 책장 사이를 걸었다. 한국문학, 일본문학, 영미문학.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었다. 읽었던 책들, 읽고 싶었던 책들, 이름만 들어본 책들.
한 권을 꺼냈다.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대학 때 읽었던 책. 표지가 바뀌어 있었다. 펼쳐봤다. 첫 문장을 읽었다.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스물두살이었고, 도서관 구석 자리에 앉아 이 책을 읽었고,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고, 나는 행복했다.
책을 다시 꽂았다. 계단을 내려가 서점을 나왔다.
편의점에 들렀다. 어제와 같은 편의점이었다. 어제와 같은 직원이 계산대에 있었다. 나는 어제와 다른 것을 먹기로 했다. 삼각김밥 대신 도시락을 골랐다. 제육볶음 도시락. 그리고 캔맥주 하나.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어제 앉았던 자리였다. 도시락 포장을 뜯고 젓가락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데우지 않았다. 그냥 먹었다.
옆 테이블에 누군가 앉았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대학생 같았다. 그녀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책을 펼쳐놓고 읽으면서. 나는 그 모습을 봤다. 예전의 나 같았다.
캔맥주를 땄다. 첫 모금을 마셨다. 쓰고 차가웠다. 좋았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파란색과 검은색 사이의 색. 3월 저녁의 하늘.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는 별이 없다.
핸드폰을 꺼냈다. 카톡이 와 있었다. 대학 동기였다. "시간 되면 연락해. 밥 먹고 싶다." 나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주 토요일 괜찮아?" 그리고 전송했다.
도시락을 먹었다. 삼각김밥보다 맛있었다. 아니, 맛이 느껴졌다. 제육의 매운맛, 밥의 따뜻함, 김치의 신맛. 천천히 씹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옆 테이블의 여자가 책을 덮었다. 도시락을 다 먹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고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걸어가면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 지금 가는 중이야." 목소리가 밝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캔맥주를 마저 마셨다. 쓰레기를 버리고 일어났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서점에 들렀고, 도시락을 먹었고,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작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변화는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극적인 게 아니라. 갑자기 모든 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도시락을 먹는 것. 토요일에 친구를 만나기로 하는 것. 서점에 들어가는 것. 하늘을 보는 것.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제와 같은 방이었다. 침대, 책상, 옷장. 하지만 뭔가 달랐다. 아니,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진 건 나였다.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일 때문이 아니라. 메일함을 열었다. 받은 메일함 말고, 임시 보관함. 거기에 반쯤 쓴 글이 있었다. 두 달 전에 쓰다가 만 것. 일기 같은 것.
읽어봤다.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어 했던 나. 표현하고 싶어 했던 나.
계속 썼다. 많이 쓰지는 않았다. 한 문단 정도. 오늘 있었던 일. 서점, 도시락, 캔맥주, 하늘. 별거 아닌 것들. 하지만 내 것들.
저장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피곤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피곤함이었다. 무언가를 한 뒤의 피곤함. 그냥 시간이 지나간 피곤함이 아니라.
핸드폰에서 알람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여덟시.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설정했다. 토요일이니까. 잠을 좀 더 잘 수 있다.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어제보다 빨리. 어제보다 깊게.
꿈을 꿨다. 오랜만에.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쁘지 않은 꿈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알람이 울릴 것이다. 나는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아주 조금만.
그렇게 우리는 변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