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서, 졸리니까, 습관이니까. 대부분의 날은 그렇다. 커피가 커피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마신다. 물을 마시듯, 숨을 쉬듯.
그런데 어떤 날은 다르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내렸다. 그런데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잠깐 멈추게 됐다. 뜨겁고, 쓰고,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
그게 뭔지 알아내려고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어떤 감각은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라진다.
커피에 관한 기억들이 있다.
처음 커피를 마신 날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커피가 하루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침의 첫 잔은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고, 점심 후의 한 잔은 오후와의 타협이고, 가끔 이유 없이 생각나는 한 잔은 그냥 잠깐 멈추고 싶다는 신호다.
커피를 마신다는 건 음료를 마시는 것 이상의 일이다. 잠깐 하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고, 뜨거운 것을 두 손으로 감싸는 것. 그 몇 분이 하루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 시간인 경우가 있다.
조지 오웰은 완벽한 한 잔의 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찻잎의 종류부터 물 온도, 컵의 재질까지 꼼꼼하게 논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지나치게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차 한 잔에 그렇게까지 진지해야 하나.
지금은 이해한다. 그 진지함은 차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 중 그 잠깐의 시간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도, 자기 방식으로 정성을 들이는 것. 그게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 작은 방법이라는 것을.
커피를 혼자 마실 때와 누군가와 함께 마실 때는 맛이 다르다.
혼자 마실 때의 커피는 내 안으로 향한다. 생각이 정리되거나, 반대로 더 복잡해지거나. 어쨌든 안쪽을 향해 움직인다. 누군가와 함께 마실 때의 커피는 그 사람 쪽으로 향한다. 커피가 매개가 되어 대화가 흐르고, 온도가 생긴다.
같은 잔이지만 전혀 다른 음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커피 대화들이 있다. 그 대화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위기는 남아 있다. 창밖의 빛이 어땠는지,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커피는 사라지지만 그 주변의 것들은 남는다.
커피가 식는다.
이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인데, 그럼에도 매번 놀란다. 뜨거운 상태로 마시려고 했는데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다. 하던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잠깐 딴생각을 하다 보면, 그 사이에 커피는 조용히 식어 있다.
그럴 때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커피에게. 그리고 잠깐 잊고 있었던 그 시간에게.
오늘의 커피는 다 식기 전에 다 마셨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오늘은 그게 됐다. 화면을 닫고, 잠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마셨다. 창밖을 보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비운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이 주는 것은 카페인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있다는 감각. 잠깐이지만 꽤 선명한 그 감각을, 오늘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조금 괜찮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