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멀어진 계절에 대하여

by 생각의정원

언제부터였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책상 옆 작은 선반에 책들이 꽂혀 있다. 세 달 전에 산 것, 여섯 달 전에 산 것, 어쩌면 일 년이 넘었을지도 모르는 것들. 책등만 보면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펼쳐보면 절반도 못 읽은 채로 책갈피가 꽂혀 있다. 그 책갈피들이 일종의 증거처럼 느껴진다. 내가 멈췄던 순간들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한때 나는 책을 꽤 읽는 사람이었다.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땐 글자 속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으면 두 번째 문장이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간이 사라지는 그 감각이 좋았다. 책 안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그 감각.


지금은 세 페이지를 읽다 보면 어느새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스스로도 언제 그렇게 됐는지 모른다. 책을 놓고 화면을 집어 드는 그 동작이, 숨 쉬는 것처럼 자동화되어 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몸이 그렇게 되어 있다. 짧고 빠른 것들에, 스크롤하면 끝없이 나오는 것들에, 어느 순간 내 집중력이 맞춰져 버렸다.


오늘 밤, 나는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그 책이 선반에서 오래 기다린 것 같아서. 이유치고는 너무 약하지만, 어떤 행동들은 그런 약한 이유로 시작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첫 문장을 읽었다. 두 번째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잠깐 멈췄다.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들어오는 속도가 느렸다. 예전에는 달리듯 읽었다면, 오늘은 발목까지 물이 찬 곳을 걷는 것 같았다. 느리고, 약간 힘이 들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 저항감이 나쁘지 않았다. 어딘가에 닿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


열 페이지를 읽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지 않았다.


작은 일이지만 왠지 기록해두고 싶었다.


책을 읽는 일이 왜 힘들어졌는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빠른 것들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느린 것을 견디는 근육이 약해진다. 그게 독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긴 대화, 긴 생각, 결론이 늦게 오는 모든 것들. 우리는 점점 그것들을 못 견디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게 슬프냐고 묻는다면, 슬프다고 해야겠다.


책 속에는 스크롤로는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천천히 읽어야만 보이는 문장들,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에 생기는 생각들, 작가가 어떤 단어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가 느껴지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나를 조용히 바꿔왔다는 걸, 책을 읽지 않게 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없어지고 나서야 있었다는 걸 아는 것들이 있다.


열다섯 페이지쯤 읽었을 때, 처음으로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짧게. 아주 잠깐. 수영을 오래 쉬다가 다시 물에 들어갔을 때, 처음엔 몸이 어색하다가 어느 순간 물이 몸을 기억하는 것 같은 그 느낌. 책도 마찬가지였다. 내 안의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책을 덮었을 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너무 짧을 것 같아서. 얼마나 읽었든 간에, 오늘은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선반에 책을 꽂아두었다. 이번엔 조금 더 손에 닿기 쉬운 자리에.


빠른 것들은 많은 걸 준다.


정보도, 자극도, 웃음도. 근데 느린 것들이 주는 건 다른 종류다. 당장 손에 잡히지 않지만 오래가는 것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달라져 있는 것들. 책이 내게 줬던 건 그런 것들이었다.


잊고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일도 열 페이지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그냥 조용한 생각으로. 대단한 결심은 대개 작심삼일이 되지만, 조용한 생각은 때때로 습관이 된다.


아마도.

작가의 이전글늦은 글, 그리고 토요일의 냄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