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30분. 아이가 점심을 먹고 나서 침실로 향한다. 낮잠 시간이다. 아내는 안방에서 오전에 육아의 피로를 풀러 누웠다. 케이지 속 도마뱀 두 마리는 따뜻한 케이지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집 안의 모든 것이 고요한 이 시간,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럽다. 마치 오래된 춤을 추듯이,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 원두 보관함을 열고 코스타리카 따라주 원두를 꺼낸다. 로스팅한 지 사흘째 되는 원두들이 적당히 숙성되어 고소한 향을 풍긴다.
그라인더의 날을 확인한다. 중세팅으로 맞춰진 날이 원두를 거칠지도 곱지도 않게, 딱 적당히 갈아낸다. 드르륵, 드르륵. 이 소리가 나는 20초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회사원이 아닌, 바리스타로서의 나.
뜨거운 물을 끓이며 필터를 적신다. 이 모든 과정이 의식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고, 그냥 주말 반복되는 나만의 작은 예배 같은 것. 원두에게 바치는 경의랄까.
첫 번째 추출이 시작된다. 뜨거운 물이 원두 위로 부어지자 부풀어 오르는 거품을 보며 미소가 지어진다. 신선한 원두의 증거다. 30초간 뜸들이는 시간.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완전히 현재에 집중한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내가 좋아하는 건 산미가 살짝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맛이다. 처음엔 쓰다고 했던 커피를 이제는 "당신이 내려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작은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예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는 하루에 수십 잔의 커피를 내렸다. 바쁜 손님들, 복잡한 주문들, 끊임없는 스팀 소리. 그때의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 두 잔을 위해서, 아내와 나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다.
커피가 완성되자 아내를 깨운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그녀에게 따뜻한 머그컵을 건넨다. "고마워." 주말마다 들리는 이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시작하게 만든다.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신다. 아무 말 없이. 케이지 속 도마뱀들도 이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다. 아이가 깨어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오롯이 우리만의 시간.
창밖으로는 이른 아침 햇살이 스며든다. 커피의 아로마와 함께 하루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말만큼은 여전히 바리스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손님을 위한.
머그컵을 들고 있는 아내의 손을 본다. 커피의 온기가 전해지는 그 손. 이 작은 의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단순히 카페인이 아니다. 하루를 함께 시작한다는 약속, 서로를 돌본다는 증명, 평범한 아침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
곧 아이가 깨어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각자의 하루로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30분,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는 이 조용한 시간만큼은 온전히 우리 것이다. 그리고 다음 주말에도 나는 또다시 이 작은 의식을 반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