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배우던 저녁

by 생각의정원

발산역 근처에서 커피를 배우기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운명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업계에서는 꽤 알려진 선생님이었다.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커피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그런 분이었다.


저녁 시간이었다. 해가 지고, 거리에 불이 켜질 무렵.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곳을 찾았다.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단 세 명. 선생님 두 분과 나, 이렇게 셋이서 긴 테이블 앞에 앉아 커피를 공부했다.


"향부터 맡아보세요."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코를 가까이 대고 깊이 들이마셨다. 처음엔 그냥 커피 냄새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기다렸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꽃 향이 느껴지나요? 아니면 과일?"


나는 다시 맡아봤다. 그리고 희미하게 뭔가 달콤한 게 느껴졌다. 블루베리? 자스민?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분명 뭔가 있었다.


"테스트 용지에 적어보세요. 틀려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느끼는 거예요."


우리는 매번 테스트 용지를 받았다. 향, 맛, 바디감, 산미, 단맛, 여운. 각 항목마다 느낀 것을 적었다. 플레이버 휠을 보며 내가 느낀 맛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찾아갔다. 베리류인지, 시트러스인지, 너트류인지. 처음엔 막연했던 감각들이 점점 언어가 되어갔다.


몇 달이 지나자 우리는 로스팅을 배우기 시작했다. 생두를 보는 법, 로스팅 머신을 다루는 법, 온도와 시간을 조절하는 법. 로스팅은 생각보다 섬세한 작업이었다. 몇 초 차이로 맛이 완전히 달라졌다.


"로스팅은 대화입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원두가 뭘 원하는지 들어야 해요. 열을 더 원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


나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로스터기 앞에 서서 틱틱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이 변해가는 원두를 지켜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대화라는 게 뭔지.


바리스타로서의 자질도 배웠다. 추출, 라떼아트, 손님 응대. 기술적인 것들이었지만, 선생님은 그보다 더 중요한 걸 강조했다.


"커피는 결국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완벽한 추출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거예요."


저녁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가끔 남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에 관한 것, 아닌 것. 발산역 근처는 조용했다. 큰 번화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적한 것도 아닌, 그런 곳이었다. 역 앞 치킨집에서는 저녁을 먹는 사람들이 보였고, 편의점 앞에는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커피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좋았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많이 느끼고 알게 되는 것.


테스트 용지는 점점 쌓여갔다. 내가 마신 커피들의 기록.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케냐 AA, 콜롬비아 수프리모, 과테말라 안티구아. 각각의 이름 아래 내가 느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엔 "쓰다", "시다" 정도였던 표현이, 나중엔 "자몽 같은 산미", "캐러멜 같은 단맛" 같은 것들로 변해갔다.


지금도 가끔 그 용지들을 꺼내본다. 내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이는 것 같아서. 커피를 배운 건 단순히 기술을 익힌 게 아니었다. 감각을 키운 거였다. 느끼는 법을 배운 거였다. 그리고 그건 커피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도 적용되었다.


발산역. 지금도 가끔 그 근처를 지나간다. 예전에 배우던 그 공간은 더 이상 없지만, 거리는 여전히 비슷하다. 저녁이면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가끔 그 골목을 걸으며 생각한다.


배움이란 게 뭘까. 아는 게 많아지는 것일까, 아니면 느끼는 게 많아지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때 배운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다는 것.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여전히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하고, 플레이버를 떠올린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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