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십 년 천권 : 책 속으로 풍덩
영화가 시작된다. 제작사와 배급사의 타이틀이 흐르면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별도로 만든 오프닝 타이틀이 있는 영화라면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기승전결 서사가 있는 2시간 동안 시각과 청각을 저당 잡히고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온다.
마지막 장면 뒤로 흐르는 엔딩 타이틀은 고유의 음악을 곁에 두고 더 절절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들이 끝난 뒤 마지막에 등장하는 어둠의 스크린은 어서 빨리 현실 세계로 돌아가라고 나를 채찍질한다.
플레이어에 CD를 올려놓는다. 부드럽게 데크가 오디오 속으로 삽입되면, 볼 때마다 늘 귀엽다고 느끼는 삼각형 모양의 플레이 버튼이 활성화된다. 1번 트랙에 별도의 인트로가 있는 앨범이라면 더욱 청각을 곤두세운다. 짧게는 1시간이 채 안되고 길어도 80분을 넘지 못하는 단 한 장의 앨범. 그 안에는 여러 악기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협연의 긴박감이 이어진다.
가사와 멜로디, 박자, 그리고 부클릿까지 이어지는 앨범의 향기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트랙이 끝나고 나면 한 번 더 1번 트랙으로 돌아간다. 청각만 저당 잡힌 대가치고는 한 번 듣기 아쉬운 앨범이 넘쳐난다.
내게 책을 읽는 일은 책 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책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을 즐기는 일과 닮아 있다. CD의 부클릿처럼 책에도 표지가 있다. 간단한 저자 소개와 함께 목차 머리글이 이어지면 마치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어지는 본문은 영화와 음악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 하나 없다. 다만 분명하게 차이를 둔다면, 영화와 음악은 한 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좀처럼 다른 것을 일절 하지 않고 본연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책은 보통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적게는 서 너 번, 많게는 열 번에 가깝게 나눠 읽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땐 내게 주어진 시간의 여유를 살피곤 한다. 영화를 한 시간 정도 보다가 끊고 다음날 보는 건, 6번 트랙까지 듣던 앨범을 끊어야 하는 건 감독과 뮤지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책은 끊어 읽는 행동에 대해 부담이 적다. 아니 솔직히 전혀 없다.
다만, 반나절이 지나 다시 읽게 될 때 전에 읽던 흐름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 어색함은 몹시 아쉽다. 따라서 나는 책을 읽을 때 동시에 두 권 이상의 책을 손에 쥐진 않는다. 단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마치고 나서야 다른 책을 손에 쥔다.
그것이 독자로서 내가 책에 저자에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