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15분 - 기상 알람이 울리지만 거의 늘 그 직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 알람을 끈다.
오후 12시 55분 - 점심을 먹고 20여 분 쪽잠을 자면서 오후 근무 준비하란 알람에 눈을 뜬다.
오후 5시 45분 - 퇴근 준비를 위해 소지품을 챙기라는 알람이 울리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하루에 세 번. 그마저도 알람이 울릴 거라는 30분 전 알람창이 스마트폰 화면에 등장한다. 알람을 위한 또 다른 알람이 뜨는 꼴이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구차스럽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알람 시대다. 알람 지옥과 다름없다. 버스가 언제 정류장에 도착하는지 알람이 울린다. 타고 있는 지하철이 원하는 정류장에 다다르면 알람이 울린다. 택시가 출발했다고 알람이 울리고. 집으로 주문한 음식이 막 배달 시작됐다고 알람이 울린다. 실시간으로 오토바이 위치까지 볼 수도 있다! 최근엔 재난문자까지 따따불로 쏟아진다. 효과는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도대체 길 잃은 분들이 하루에 그렇게나 많을 수가 있는가. 물론 부디 그들의 신속한 귀가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이들 학원비 결제 알람을 미리 설정하고, 양가 어르신 생신과 집안 대소사도 미리 달력에 기재한다. 갑자기 바뀐 방과 후 학교 일정, 학원 임시 휴일, 주말마다 배우는 볼링의 참석 여부 등등... 가끔 들여다보는 아내의 스마트폰 일정표는 인기 있는 연예인의 스케줄표 못지않게 빼곡히 채워져있다. 때때로 아내를 놀리느라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한 메모지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냐'라고 했더니 스마트폰에 모든 것을 입력하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다행히 그전에 비해 빼먹는 일은 거의 없게 됐다.
예전에는 자명종 시계가 있었다. 디자인도 각양각색으로 천차만별 가격대를 자랑하던 그 시계는 침대 머리맡 혹은 책상에 늘 놓여 있었다. 초침 분침 시침 말고도 알람을 위한 아주 작고 귀여운 바늘 하나가 있었고 그 시계의 위치로 알람을 설정할 수 있었다. 시계는 12시간 간격이기 때문에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를 분간하지 못하고 알람이 울렸던 시절이었다. 그다음 마주한 것이 두 개의 알람 설정이 가능한 알람시계였고, 이후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적게는 세 개 많게는 다섯 개 이상의 알람이 중복 설정되는 시기도 있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시대. 교통, 음식 배달, 택배 배송, 중고물품 거래, 생리주기, 출산 예정일, 예방접종 예정일, 청약저축 입금, 저축 이자, 어린이집 대기, 식당 대기, 생일, 연애 일수, 모든 것들의 설정이 가능하다. 원하는 시점에 알람을 설정할 수 있고, 또 원하지 않지만 바득바득 알람을 울려준다.
아이콘의 모양도 그 내용도 그에 따른 우리의 반응도 달라진다. 반가운 것과 불쾌한 것. 그리고 그 어떤 감정조차 섞어낼 수 없는 것들까지 물밀듯 밀려온다. 늘 하는 말로 편리해진 것은 맞지만 절대 좋은 것은 아닌 시대. 그래서 그런 알람 따위 없이 그저 차분하게 그 무엇도 방해하거나 간섭하거나 훼방하지 않고 홀연히 지내는 차분한 시간이 더 그리워진다.
스스로 기록하고 기억하고 찾아내는 행위가 점점 사라진다. 디지털이 만연한 시대에 죽자고 아날로그로 거슬러 올라가자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들을 의지하고 기대고 맡기는 바람에 진작 얼마 되지 않던 기억력과 대비하는 마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탁해지는 것만 같다.
여전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믿으며 손꼽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둘째를 위해 주문한 제품이 언제 배송되는지 오는 알람. 알뜰살뜰 모아 1년 예치한 정기예금에 그래도 두둑한 이자가 더해져 곧 해지된다는 알람. 풋풋한 청춘들이 썸을 타며 주고받는 톡에 방금 보낸 메시지와 함께 노란색 숫자 1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알람이 그러하다.
사랑하고 함께 어울리고 미래를 계획하는 그 알람만큼은 여전히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