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잭 슈렉 Sep 29. 2024

[독서일기] 무서운 그림들 ㅣ 이원율 ㅣ 빅피시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봐도 모자랄 텐데 그마저도 반골 기질일까? 기괴하고 섬뜩한 것들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 미술 분야 책도 적잖이 읽었는데 종종 평범하지 않은, 비범함을 넘어선 약간의 껄끄러운 소재들을 다룬 책들도 그간 제법 마주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무서운 그림들>이다. 상반신은 개의치 않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손에 꽃 한 송이 쥔 누군가의 하반신만이 책 표지에 건조하게 자리한다. 테두리를 꾸민 앤티크풍의 프레임은 표지를 펼치는 순간 이 책에 퐁당하고 빠져들 것만 같은 암시를 전한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클로드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는 앞으로 펼쳐지는 무서운 이미지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를 정확하게 제시하는데 성공한다. 죽은 여자의 시체를 캔버스에 담았을 화가의 마음과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 차가운 육신이 세월을 넘나들며 여전히 유효한 존재로 자리한다는 것은 예술이기 때문에 갖는 가장 큰 매력이자 무기가 된다. 실제 그림의 크기를 책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 그림 정보에 사이즈를 표기한 것은 그래서 그림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이 그림의 스케일과 웅장함을 상상하게 만들어주는 지표가 된다. 자기 손 한 뼘이 몇 cm 정도인지 길이를 수시로 잴 수 있을 요령도 필요할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 환상과 현실 사이, 잔혹과 슬픔 사이, 신비와 비밀 사이 등 총 4개의 소주제로 이뤄진 구성으로 들어가 보자. 공격적이고 거친 이미지가 연이어 등장하지만 저자는 이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화가의 배경에 대해 많은 부분 신경을 썼다. 왜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해 화가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서운 그림 너머로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호흡이 다정한 언변과 꼼꼼한 자료 조사로 이어진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으로 자식을 여럿 잃은 작가가 그린 그림에는 분명 분노와 증오가 서려있다. 그가 표현하는 죽음은 직진의 형태로 머뭇거림 없이 악랄할 정도로 신속하게 행해진다. 해골이 많이 등장한다고 무조건 무서운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표현했을까 의구심만 가득 피어날 정도로 캔버스에 암흑과 어둠 그리고 빛이 아닌 그림자의 긴 실루엣을 정교하게 뽐낸다. 잔혹한 인어공주의 이야기, 두 여인이 사랑을 나누는 과감한 장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신분으로 초췌한 몰골로 삶을 마감하는 화가의 자화상 등 살아있음과 죽음에 대한 경계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흙, 물, 불, 봄, 여름, 가을 등 자연의 재료와 계절을 테마로 황제의 얼굴을 그린 작품. 클림트의 작품 소유권을 둘러싼 그야말로 무서운 과정의 연대기, 시대가 만들어낸 난센스와 표독한 인간의 욕망이 흠칫을 낸 명작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영상 매체라고는 오직 그림뿐이었던 당시 그야말로 '환상'을 표현하는데 유일한 장르인 그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20대 초중반,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담았던 개인 홈페이지 메인에는 오필리아가 늘 누워있었다. 짙은 초록의 숲,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깊은 어둠의 물에 차갑게 누워있는 그 이미지는 나를 한순간에 사로잡았었다. 그림을 보고 사랑 혹은 흥분이란 감정을 느꼈다면 바로 이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잔혹과 슬픔 사이 세 번째 소주제에 다뤄진다. 책을 읽어가며 혹시라도 나오려나 내심 기대를 했고 이렇게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순간이었다. 20여 년이 흘러 다시 봐도 그녀의 표정을 나를 숨멎게 만든다. 


외눈박이 거인의 모습, 혁명의 시대를 거쳐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시대의 자화상, 그리고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지막 소주제 신비와 비밀 사이에서는 시각적으로 무서운 작품보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 그림에 대해 들려준다. 


미술 주제의 책을 읽을 때의 가장 큰 쾌감은 페이지에 담긴 그림을 씹고 뜯고 맛보는 재미에 있다. 만화책을 한 장 넘길 때에도 왜 이렇게 그렸을까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더욱이 단 한 장의 그림인데 어떻게 쉽게 넘길 수 있을까. 그래서 글자보다 그림이 많아 쉽게 읽힐 것 같으면서도 다시 그림을 보고 또 보고 뒤로 몇 페이지 되돌아가서 다시 보고 자꾸 보는 그 맛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좋은 책 덕분이다. 황홀한 휴일을 그렇게 보냈다. 


<책 자세히 보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3690458

이전 08화 [독서일기]음악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