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십 년 천권 : 책 속으로 풍덩
비약이라고 말한다면 억지로 우기진 않겠다. 하지만, 분명 그런 비슷한 수준의 쾌감이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느껴졌다. 매번 대출하는 책에서 그랬다면 그건 진짜 새빨간 거짓말이 맞다. 하나,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봤을 때, 초반 3~4년 까지는 그런 책이 없었다.
물론 좋은 책이 있었고 다 읽은 뒤의 여운이 다른 책에 비해 몹시 매우 아주 길게 이어진 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격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느낌은 5년 차 이후 손에 꼽을 정도로 일어났다. 두 손까지도 필요 없는, 하나의 손만으로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매우 적었다. 2년에 한 권 꼴이라면 가장 적당한 비유가 될 것 같다.
그런 책들의 공통점은 대략 이렇다. 3분의 1 지점까지도 그런 느낌은 오지 않는다. 반이 지나면 스멀스멀 ‘이 책이구나...’라는 느낌이 밀려온다. 물론 그렇게 한껏 흥에 취하다가 끝이 시들시들 끝나는 책도 있었다. 때문에 3분의 2 지점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된다.
대출해서 읽기 시작할 때 절대 목차를 들여다보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홍보에 혈안이 된 영화라 하더라도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다짐한 영화는 예고편도 피하는 이유와 같다. 목차를 미리 보는 것은 이 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이어지는지 너무 쉽게 알아차리게 되는 일종의 스포일러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체 분량의 70%를 넘어서게 되면 그때부터 차오르는 벅찬 감동과 글자 하나 문장 한 줄 단락 한 덩어리를 읽어 나갈 때의 흥이 넘쳐난다.
그래서 페이지 구석구석 글자 하나 문장 부호 하나라도 놓칠까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읽게 되는 많은 책들에서 등장하는 표현이나 전문 용어가 모두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낯선 느낌이 들면서도 묘하게 내 옆구리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그런 느낌이 특히 이런 책에서 더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온몸에서 짜릿한 쾌감과 주체할 수 없는 격렬한 감동이 쓰나미 급으로 휘몰아친다.
좋아하는 건 백번쯤 봐야 스스로에게 떳떳한 취향 덕분에 이런 책은 다시 한번 더 읽는다. 때문에 남은 책들까지 대출 기간 이내에 읽어야 하는 약간의 헐떡거림이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정말 너무 좋은 책은 없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 구입을 한다. 책장 한쪽에 얼마 되지 않는 책이 늘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는 것만 같다.
중독과 몰입이 깻잎 한 장 차이의 격차라면, 우리는 흔히 중독보단 몰입을 더 좋다고 말한다. 윤리적으로 그 논리를 거스를 맘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독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 인간적이지 못한 것 같다. 시작과 끝을 스스로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가장 큰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몰입보다 중독되어 즐기는 맛...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어릴 적 오락실은 곧잘 다녔지만, 이후 PC게임이나 스마트 폰 게임은 일절 하지 않는 나도 한때 2박 3일을 PC방에서 살면서 스타크래프트에 매진했던 적이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열 편의 영화를 한 번에 빌려서 24시간을 쉬지 않고 영화도 봤었다.
1년에 하루 날 잡고 산울림의 앨범 데뷔 앨범부터 마지막 정규 앨범까지 13장의 앨범 모두를 듣는다. 연례행사가 된 지 10년이 훌쩍 넘는 나만의 이벤트이다. 이런 경험들에 비해 책을 읽는 일은 솔직히 중독의 발톱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 몰입 앞에서는 명함 정도 내밀 수 있을까?
물론 문전박대는 늘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그런 책을 만날 땐 정말 온몸에서 땀구멍들이 격한 호흡을 하는 것 같은 일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내가 죽을 때까지도 다 읽지 못하는 도서관 한 곳에 소장된 책만 머릿속에 떠올려도 몹시 설레게 된다.
너무 많은 정보 속에 또 정말 많은 책들 속에 나를 흥분시킬 책은 어디 숨어 있단 말인가. 누군가의 추천 혹은 밑밥이 두둑한 홍보에 휘둘려 읽을 수도 있겠지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희박한 가능성으로 1년에 한 권뿐일지라도 그 짜릿함을 위하는 마음가짐은 몰입과 중독의 경계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휘청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