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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

by 잭 슈렉

열두 살에 한 번, 이듬해에 한 번 더.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깃든 병으로 수술을 두 번 했다. 나이가 어려 전신마취를 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했는데 두 번째엔 수수실 앞에서 숫자를 세라는 말이 그렇게 무서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첫 수술 때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간호사분들이 꽤 고생했었단다. 병을 고치기 위해 하는 수술인데 잘못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를 수도 있단 생각을 처음 해봤다.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나 세 번째 전신마취를 하게 됐다. 의료시스템은 그때로부터 엄청나게 발전했을 터, 의심은 눈곱만큼도 안 했다. 하지만 오랜 두통으로 신경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담당 의사의 소견서가 수술에 필수라 하여 발행을 받았는데 0.5%의 확률로 뇌졸중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말이 0.5% 지 200명 중에 한 명 꼴이라는 말이었다. 수술 도중 혈압관리를 제대로만 하면 불상사는 없다고 했다. 되려 그 말이 더 무서웠다.


선천성 질환은 3만 명 중 1명꼴의 발병률을 보인다. 복권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다행히도 성철 스님의 말씀 몇 자에 최면을 걸어 그 병마저 나려니 했다. 태어나면서 얻어걸린 저 확률에 비하니 200명 중 1명의 확률은 갑자기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소견서 받던 날, 그리고 수술실 바로 앞에서. 딱 두 번 그랬다.



40대 중반, 해철이 형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의료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이른 오전 세 번째 전신마취 수술을 끝내고 회복하는 하루 종일 그의 음악을 들었다. 다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가 내게 들려준 삶의 지혜와 철학을 새 삶을 맞이하는 마음에 더 깊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 혹은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도 싱크홀에 빠져 죽는 세상이다. 갑자기 맹수의 공격을 받는 시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는 생각보다 바짝 붙어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으니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이, 맞다.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그 시절 맡았던 지독한 소독약 냄새는 거의 없었다. 적당한 추위를 가시게 해줄 따뜻한 온풍에 데워진 이불이 너무 포근했다. 서서히 그 범위를 넓혀가는 통증이 불편했지만 그 정도 후유증 없는 수술이 있을까. 통증 또한 내게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이라 생각했다. 맛도 향도 냄새도 없는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금식으로 반나절 들이키지 못한 그 물이 가장 마시고 싶었다.


시선도 마음도 정신도 투명한 물과 같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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