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십 년 천권 : 책 나 아이들 세상
초등학생 때는 정말 많은 꿈을 품었었다. 요약해 보면 대통령, 선생님, 기자, 요리사, 과학자 정도였고 그중 가장 이루고 싶었던 꿈은 작가였다.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장면을 자주 떠올려보곤 했다. 막연한 그 꿈은 아주 얕은 욕망의 깊이로 나를 가끔씩 흔들어 놓았다.
백일장에 집중하게 되었고 상장이라도 하나 받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교지에 제법 긴 장문의 영화 리뷰가 실렸을 때의 쾌감은 아직 내 몸속에 남아 있다. 좋은 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지에 실린 모든 글 중 가장 분량이 길었다. 질보단 양이다. 그때는 그게 좋았다.
2년짜리 대학생 시절엔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업도 빼먹고 낮술을 먹었으니 글을 쓸 시간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그러다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할 때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 한 장을 발견했다. 문예창작과에서 주관하는 문학상 소식이었다. 마감까지는 2주가 넘게 남아있었다. 할까 말까를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응모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올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에 괜히 싱숭생숭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마감 직전에 술기운을 빌어 순식간에 응모 분량을 채웠다. 제출했고 한 달 뒤 가작에 당선되었다. 가장 의아한 반응을 보인 건 조교누나였다. 왜 그랬어?라는 표정을 내게 지어 보였다. 물론 말도 그렇게 했다. 상장을 받으러 문창과 조교실에 갔더니 전혀 관련 없는 디자인과에서 응모한 것도 신기하고 당선도 되어 더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 뽑질 말던가. 좋았던 기분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상금이었지만 친구들이랑 술을 마셨다. 누구 하나 내가 쓴 글을 궁금해하는 녀석은 없었다. 우린 그저 술이면 좋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술, 함께 어울리며 대화 나누고 노래 부르고 밤을 새워도 모자랄 낭비 해도 좋을 청춘을 우리는 그렇게 만끽했다.
몇 개의 잡지를 거치며 디자인도 하고 글도 끼적거리며 20대를 흘려보냈다. 괄목할 만한 성과 따위는 진작 바라지도 않았다. 뭘 바랄 만큼 노력하거나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치가 있어야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바라며 그 아래 눕기라도 했으면 다행이다. 그러던 중 우연에 가까운 아니 기적에 가까운 기회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 역사에 규모가 무지 큰 출판사에서 문고판으로 지식 시리즈를 출판하는데, 그중 한 분야를 내게 맡겨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나보다 그 시리즈에 먼저 참여한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이렇게 내가 과대평가되어도 좋은 것인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최초의 단행본이 될 좋은 기회였다.
배운 것 없고 노력한 바 없지만, 다가온 기회를 내던질 순 없었다. 머리를 끙끙 싸매고 열심히 작업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책이 출판되었다. 만날 약속장소로만 꿀을 빼먹던 교보문고에도 책이 진열되었다. 몹시 신기한, 그야말로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환상적인 경험으로 포문을 열었다면 더 노력할 법도 있고, 글이 좋아 더 글을 쓰면서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글보다 술을 더 좋아해서 술장사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글을 작가의 길을 나는 손에서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몇 년이 흘렀고, 결혼 4년 차에 첫째의 출산을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몇 년 전 출판된 책을 보고 e-book 출판사에서 책을 준비해보지 않겠냐고 나를 찾았다. 세상에! 또다시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나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버릴 수는 없었다. 나름의 준비를 꼼꼼하게 이어 나갔다. 계절별로 네 권의 시리즈를 완성했다.
이후 첫째가 태어난 이듬해부터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종이책과 e-book에 한 번씩 저자 대접을 받는 호사를 누린 것에 대한 뒤늦은 자기반성의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도서관을 다녔는지 모른다.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의 조각들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보다 더 많이 작가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 비해 운이 좋았던 것일 뿐. 그리고 내게 주어진 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되갚은 맘으로 책을 읽어 나갔는지 모른다. 차곡차곡 대출하고 반납하기를 반복하며 읽어나간 책들이 올곧이 내 머릿속에 기억 속에 첩첩이 쌓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 동안 생각하고 의식하고 느끼면서 이해했을 모든 자극들을 나는 분명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릴 적 꿈을 이룬 사람. 그 꿈을 두 번이나 경험해 본 시절에 대한 추억. 무엇보다 더 노력해서 앞으로 그 꿈을 더 오래 자주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인생.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보답과 준비, 그리고 찬사와 격려가 내게는 책을 읽으면서 일어난다.
그래서 더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