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사상 최초이자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선명한 빈부격차의 대비로 시작, 위조와 거짓의 편법을 이용하여 부의 축적에 목을 맨다. 급기야 계급 간의 싸움으로 번지는 서사에서 소리 없이 드러나는 트리거는 다름 아닌 냄새였다. 유독 선 넘는 것을 싫어하는 부자는 선을 넘은 냄새를 감당하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결말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눈 감으면 안 볼 수 있다. 입을 닫으면 말을 아니 할 수 있다. 하지만, 냄새는 숨 쉬지 않고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 그런 냄새와 더불어 절대 거역하기 힘든 것이 바로 소리다. 두 개의 귓구멍을 그 무엇으로 꽁꽁 틀어막는다 한들 아주 미세하게나마 소리는 들어오게 된다. 완벽한 차단이 가능해지려면 상대적으로 더 큰 소리가 필요하다.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지니 냄새 못잖은 강력한 자극이다. 아니, 어쩌면 냄새보다도 더 멀리 전달되는 소리야말로 수시로 선을 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부실 공사로 인한 층간 소음 분쟁은 그 어떤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지옥과 같은 현실을 선사한다.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가 책임져야 할 일을 왜 이웃끼리 다투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어린 자녀가 있는 집은 거실에 빈틈없이 매트를 설치한다. 걷는 소리, 욕실 소리, 말소리와 연주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집을 나서면 어떨까.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과 오토바이의 굉음이 포문을 연다. 스마트폰 시청 소리, 각종 알람 소리, 수시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등은 일상다반사가 되고 있다.
잠시 쉬기 위해 찾은 카페에서도 좌석 간 거리가 가까워 옆 테이블 대화 소리도 고스란히 들린다. 이런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쓰는 이어폰은 사용자에겐 이로울 수 있으나, 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에겐 그마저도 소음이 된다. 흔한 백색소음이려니 싶다가도 때와 장소가 지닌 평온함을 깨부수고 튀어나오는 소음이 수시로 고개를 든다.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해외여행이 최근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높은 고도에서의 10시간에 육박하는 오랜 비행시간을 아이가 참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주 울 수밖에 없고 기내에 있는 다른 승객들이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이해한다고 한들, 대안이 없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가을이 오면 학교에서는 운동회를 한다. 1년에 하루 그날만큼은 원 없이 뛰고 땀 흘리고 팀을 나눠 정직한 승부를 경험하는 날이다. 오래전 학교 운동회야말로 마을 잔치 수준의 큰 행사였다. 청팀 이겨라! 백팀 이겨라! 목이 터지라 응원했다. 이겨도 기뻤고 져도 즐거웠다. 매일 등하굣길에 지나가는 운동장인데도 그날만큼은 달리 보였다. 대단할 것 없는 부상에도 절로 신이 났다. 자녀가 있든 없든 이웃 어른들도 참여했고, 학부모 경기에는 아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뛰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강산이 두세 번 바뀌었다. 최근에는 예체능 수업이 대학 진학에 필요가 없다며 수업 시간도 대폭 축소하는 경향에 이르렀다. 이에 운동회를 매년 치르지도 않는다. 그마저도 운동회를 통해 즐거운 추억을 남기게 되면 좋으련만, 어째 운동회를 하기에 앞서 인근 지역 주민에게 양해를 구하는 풍경이 연출된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운동회 소음이 시끄럽다고 민원이 발생하니 미리 굽신거리는 모양새다.
세상에나. 계절에 한 번도 아닌, 1년에 두 번도 아닌 그야말로 단 한 번 열리는 운동회다. 그것도 반나절뿐인데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고성방가 수준의 노래와 추태에 가까운 춤판이 벌어질 리 만무하다. 마이크를 손에 쥔 사회자 목소리와 여러 종목이 진행되는 동안 흐르는 배경음악이 전부다. 조금 더 가미하자면 아이들이 신나게 웃고 떠드는 소리, 이겼을 때의 환호성이 전부다.
거주 지역이 앞서 언급한 비행기처럼 폐쇄된 공간도 아닐 텐데, 얼마나 그 소리가 참기 힘들다고 민원까지 넣는단 말인가. 평일 낮에도 충분히 쉬어야 하는 사람들도 분명 적진 않겠으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문화도 아니고 그야말로 수십 년을 이어온 연간 행사에 못된 마음씨를 쓰는 건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순 있다. 그렇다면 현충일 묵념 사이렌도, 수시로 펼치는 민방위 훈련 사이렌도 민원을 넣을 것인가? 국가가 주체일 땐 침묵하고, 만만한 학생들이라 민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비겁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아파트 내 놀이터에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까지 시비를 거는 일도 있다고 하니 참혹한 수준이다.
그깟 운동회가 저출산을 해결하는 비책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의 출산율을 겪고 있는 시점에 아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입자가 지출하는 비용으로 운영되는 아파트 놀이터 이용을 인근 모든 아이에게 허락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물론 여기에서도 놀이터는 놀이터답게 운영하는 게 사회적 합의라고 본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려 12년을 교육받으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학교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허락된, 어쩌면 유일한 공식적 이벤트가 바로 운동회다. 어른의 세계에선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듯, 수학여행과 소풍 그리고 운동회 역시 학업의 연장이다. 네모반듯한 책상에 앉아서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고 결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험과 체험활동, 사고를 통한 학습이야말로 가까운 장래를 더 밝게 해줄 밀알이 된다. 아이들이 누릴 보편적 행복을 어른들의 잣대와 이기심으로 짓눌러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나이지리아 속담이 떠오른다. 양보는 결코 손해가 아니다. 어른들의 배려와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선을 넘은 것은 운동회 소음이 아닌, 어른들의 이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