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길

바나나

by 잭 슈렉

서울 촌놈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제철 과일이나 계절에 따른 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무는 나무고 꽃은 그저 꽃일 뿐이었다. 오솔길 따라 흐르던 시냇물과 산허리를 타고 흐르는 바람의 결은 동화책에서만 마주할 수 있었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지만 나무는 고사하고 그 흔한 화초 하나 없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은 참으로 좋은 핑계가 아닐 수 없다. 개량 한옥 옥상에서 바라본 산동네 아래 모습엔 초록빛 나무보다 빽빽한 건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을 열면 네모반듯한 보도블록과 시멘트로 만든 전봇대가 골목을 지배했다. 모든 것들이 단단했고, 차가웠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풍경 한가운데 그곳에는 남산이 있었다. 스포츠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새벽 일찍 남산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를 가로질러 함께 국립극장 너머로 펼쳐진 산책로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도시 속에 숨어 있는 숲이란 것을 서른 살이 훨씬 더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약속했다.


얼마 뒤 아이도 태어났다. 아빠가 되었다는 기적과도 같은 일. 새빨간 피가 범벅이 된 채 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의 모습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자주 숲으로 향했다. 집 근처 공원부터 남산, 그리고 서울 곳곳에 자리한 여러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그런 곳이라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터전은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허울 좋게 새것처럼 꾸몄지만 오래된 자연보다 더 낡고 비루한 모습의 도시. 유년 시절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났어도 여전히 단단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로 채워진 도시에서 여전히 나는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쉬지 않고 울리는 벨 소리. 키보드 자판과 마우스와 스마트 폰을 두드리는 손놀림.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의 공회전, 냉각팬의 굉음 사이로 지하철이 흐른다.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흔적으로 남겨지는 재와 침 그리고 쓰레기가 나뒹군다. 쏜살같은 오토바이와 초점 없이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목구비가 반복된다. 한때는 낮과 밤의 경계가 제법 뚜렷했었다.


인기척을 느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작을 멈추고 집중을 이루면 아주 작은 모든 것들이 포착된다. 그 작은 것들의 시간은 우리가 누리는 시간의 길이와는 다를 것이다. 마구잡이로 늘어선 나무들과 가지들은 서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자연의 큰 숨은 다시 땅속으로 스며든다. 그 자리에는 배설물과 씨앗들이 나뒹군다.


둘러보면 조금 전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자연은 단 한 번도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복이 아닌 재생과 연속을 위한 끊임없는 작용의 속삭임은 낮과 밤을 관통한다. 시간도 방향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움직이고 이어진다.


쇳덩이로 높이 올린 전봇대에 화분을 매단다. 아스팔트 사이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보이면 꽃을 심는다. 질릴 정도로 걷기 대회를 하고, 봄과 가을엔 죽자고 산을 찾는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산불 진화에 나선 소방관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우는 아니 떡 하나 더 주는 마음일까. 한없이 미안한 자연에 최소한의 예의만 지킬 뿐이다.


회색의 도시를 뒤로하고 초록의 숲에 다다른다. 채도만 달리하는 회색과 달리 초록은 그 속에 여러 색을 품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라하더라도 줄기와 가지, 이파리에서 드러나는 색은 아무리 두꺼운 컬러 북을 가져와도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렵다. 직선은 찾아볼 수 없다. 자연에는 오직 곡선만 존재한다.


번화가로부터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꼬박 30분을 차로 달려야 다다를 수 있었던 지인의 펜션이 있었다. 먼 곳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숲의 어느 곳에 눈길을 고정한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면 들리지 않던 소리와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일어난다.


새벽이 빠르게 찾아오고 그만큼 밤도 빠르게 찾아오는 곳. 쌀쌀한 공기를 뺨에 두고 하늘을 바라본다. 인공적인 불빛 하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의 시간이 펼쳐진다.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던 숲 뒤로 밤하늘의 별이 쏟아진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내 머리 위로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그곳에서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두려움에 휩싸였다. 더는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시로부터 적응된 그래서 어쩌면 숲으로부터 초대받지 못한 영혼이 어렵게 만들어낸 유일한 이유였다. 그 때문에 돌아오는 일정을 예정보다 서두르길 반복했다. 서두른 일정만큼 그곳은 추억 속 공간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골목처럼 다시 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에 존재한다.


자연에서 느낀 오감은 도시에서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벽돌과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도시 속에서 자연은 더 숭고하다. 그래서일까. 자연을 훼손하며 세운 그곳에 다시 자연을 꾸미고 있다. 때로는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격리된 도시에 인공의 자연을 만들기에 급급하다.


운동이 필요한 큰아이와 함께 휴일 새벽 남산으로 향한다. 송골송골 땀이 맺힐 즈음 다다른 산책길을 걷다 보면 녀석도 느끼나 싶다. 공기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더 많이 숨을 쉬고 싶다고 말한다. 먹고살고자 뿌리내린 도시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위대함은 아이로부터 다시 깨닫게 된다. 걷기만 하는 데도 좋은 기분이 만들어진다.


아이와 함께 자연이 내 안으로 뿌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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