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엄마 젖을 먹고 나서 트림을 늦게 할 때면 괜한 조바심이 난다. 평소와 다른 냄새와 묽기의 똥만 봐도 아픈 건 아니가 싶어 걱정이 든다. 그야말로 아기일 땐 이런 원초적인 것들에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이후 말문이 트이고 몇몇 단어를 익혀 문장을 조합할 시기가 온다.
이때엔 논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이의 질문에 친절한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케이크의 초가 한 개 더 늘어나면 상황은 좀 더 긴박해진다. 딸아이는 조금 덜 할까? 두 아들의 아빠에게 아이들과의 격렬한 몸싸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집게손가락을 내밀어 허공에 총을 쏘면 죽는시늉을 한다. 눈싸움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먼지가 들어와 눈을 깜빡거린다. 팔씨름을 이기려고 온갖 기합을 넣으면서도 내 손등이 늘 바닥에 먼저 닿는다. 아이가 술래를 하고 꼭꼭 숨어야 할 때에도 머리만 커튼 너머로 감춘다.
있지도 않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라도 골인 지점을 양보한다. 손끝에서 떠난 종이비행기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권투, 레슬링, 태권도, 그 어떤 겨루기를 해도 KO패는 따 놓은 당상이다. 지루한 승리는 얼굴에서 금방 드러난다. 아슬아슬한 승부, 간발의 차이로 이길 때의 맛을 이미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아빠를 이길 때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싱크대보다도 작은 키로 나를 올려다볼 때의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정작 내 아빠가 나랑 놀아준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기에 내겐 더 생소한 영역이다. 매번 져줄 수는 없기에 가끔은 이겨보기도 하는데, 그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표정엔 여러 감정이 섞인다.
아빠가 자기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황당해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어금니를 꽉 깨물기도 한다. 넘어지면 일어설 수 있어야 하고, 달콤한 승리의 맛과 함께 겸손과 배려를 알기를 바란다. 그렇게 아빠의 승리는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더 자주 일어난다.
큰 아이와 함께 목욕을 하던 평범한 어느 날. 내심 꼭 말하고 싶은 눈치다. 한참 뜸을 들이고는 아껴둔 질문을 던진다. 조금 전 끝말잇기에서 아빠가 일부러 져준 거 다 알고 있다고 고백하듯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옷을 다 벗고 있는데, 장소를 달리해 공공장소에서 빨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아니라고 무슨 소리냐고 몇 번을 반복해서 고개를 가로 저어 상황을 모면한다. 하지만, 이미 들통 난 꼼수는 이듬해 초등학생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세 살 터울 동생이 네 살이 되자 두 아이와 동시에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난이도를 큰아이에게 맞추자니 둘째가 몹시 힘들어한다. 그렇다고 어린 녀석에게 맞추자니 큰 놈은 금방 시시해한다. 결국 번갈아가며 각기 다른 수준으로 흥미를 이끌어 낸다. 간발의 차이로 져줄 수밖에 없던 연기를 두 종류로 나눠해야 한다. 둘째가 지켜볼 땐 그전에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하지만, 큰 아이가 지켜볼 땐 조금 더 나사를 풀어야 한다. 사뭇 다른 아빠의 모습에서 큰 아이가 자꾸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많은 놀이들 중에서 가장 힘든 건 가위바위보다. 오랜 승부 속에서 아이들의 습관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셋이서 동시에 할 땐 가늠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결국 삐치거나 토라져도 달래주고 위로하며 마무리된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긴장하게 되는 놀이다.
언제까지 아이들과 지금처럼 놀아 줄 수 있을까. 막내는 제 형이 앞서 그랬듯 언제쯤 음흉한 미소로 날 바라보게 될까. 궁금한 맘으로 떠올려본다.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어 보였던 내 새끼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천천히 말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지 얼른 말하라고 재촉하는 재잘거림들. 주말 아침이면 얼른 일어나서 놀아달라고 양 옆에서 동시에 뽀뽀를 해주고, 집 앞 놀이터를 나갈 때도 운동화보다도 아빠를 먼저 챙기는 마음들...
굳이 하라고 시키지 않을 공부, 아빠보다 더 재밌을 친구가 나타나면 양보할 앞날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성장 과정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앗이 되길 감히 바랄 따름이다.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아빠를 이긴 쾌감이 좋은 비료가 되길 바란다. 역전이 될 테지만, 내 체력을 걱정해 주면서 날 위해져 줄지도 모른다. 환희의 순간을 위해서 체력 관리만큼은 아끼지 않아야겠다.
허공을 향해 총을 쏘는 대신 땀에 젖은 두 손으로 악수를 나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뻗어 포옹을 전한다. 치킨을 걸고 팔씨름을 하고, 아내는 깍두기 삼아 둘씩 편먹고 승부를 겨룬다. 훗날 맞이할 소중한 시간들을 일찍 상상해 본다.
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더 아찔하고 가슴 조마조마한 승부를 두 아이에게 선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