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잡지

바나나

by 잭 슈렉

포털 사이트가 막 기지개를 켜고 누구나 이메일을 갖게 될 즈음 한메일(hanmail)과 핫메일(hotmail)은 발음이 비슷해서 자주 혼동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핫메일을 ‘뜨거운 메일’이라 표현했다.


내 인생엔 뜨거운 잡지가 있었다. 정말 뜨거운 잡지는 아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내용만큼은 몹시 뜨거운 것이었다. 뜨거운 음악을 다루는 잡지, 그래서 이름도 핫뮤직(HOT MUSIC)이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가요를 접수했다는 착각과 함께 해외로 눈을 돌렸다. 말랑거리는 팝보다 날카롭고 시끄러운 록, 더 우렁차게 연주되는 메탈이 달라붙었다. 록의 르네상스가 한풀 꺾인 시대였지만 그 여운은 길게 이어진 때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발걸음은 음반 매장으로만 향했다.


비정기적으로 받던 용돈을 아끼고 아껴 한 달에 한 장의 CD를 겨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앨범을 듣고 라디오만 듣는 것으로 음악에 대한 갈증이 해소될 리는 없었다. 명동과 남대문, 황학동의 헌책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록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를 알게 되었다.


당장 새 잡지를 살 형편은 못됐다. 과월호뿐이었다. 헌책방을 전전했다. 그렇게 얻은 잡지는 늘 책가방에 갖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도 이어폰을 귀에 꽂아 음악을 들었고, 교과서 아래로 잡지를 펼쳐놓고 읽기를 반복했다. 말 그대로 너덜너덜해질 정도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앨범, 밴드, 그 바닥의 근황, 듣도 보도 못한 여러 이야기에 동호회 소식까지 접할 수 있었다.


잡지란 것이 유행을 가장 첨예하게 다루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핫뮤직에는 단순히 소비를 조장하는 내용만 욱여넣지 않았다. 진짜 록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배려하는 잡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거리가 넘쳐났다. 읽다 보니 막연한 꿈이 생겨났다. 평소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면 이유를 불문하고 짧게나마 리뷰를 쓰던 습관을 이어왔었다. 언젠가는 핫뮤직 기자로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났다.


술을 마셔도 아무렇지 않은 20대가 되었고, 폭풍 같던 대학 생활을 뒤로하고 서둘러 사회인에 이르렀다. 그리 길지 않은 1년이란 시간을 웹디자이너로 일했고, 조직 생활에 신물을 느낀 나머지 일러도 너무 이르게 프리랜서로 이정표를 전환했다. 미비한 경력과 하찮은 포트폴리오로 굶기 일쑤였다.


지인 소개로 밥벌이를 연명하던 중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핫뮤직의 편집 디자이너 일이었다. 물론 맘속으론 기자를 더 꿈꿨으나, 설령 시켜준다고 해도 수락할 수 있는 실력이 못됐다. 서브 디자이너라도 대만족이었다. 무엇보다 제안 배경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디자인도 잘해야 하지만, 이왕이면 음악을 좋아하는 디자이너라면 한결 더 결과물이 좋을 것 같아 주변에서 찾다가 나를 소개해준 것이었다. 한 달에 3~4일 근무, 보수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제안을 수락하고 첫 미팅을 위해 사무실을 방문했다. 열악한 잡지 시장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듯, 사무실은 홍대 뒷골목 지하에 있었다. 사장님과 짧은 면접을 봤고 메인 디자이너 분과도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정해진 포맷이 있고 그 안에서 적당히 내 의견을 첨가해 디자인하는 구성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꼬박 5년 넘게 봐온 잡지를 내 손으로 만들다니! 작업의 A부터 Z까지 꼼꼼하게 점검해 준 메인 디자이너의 배려는 서너 달 뒤 나를 완벽한 서브 디자이너로 만들어주었다.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이 끊이지 않는 사무실. 흠모하던 기자들이 마감에 쫓기며 바삐 원고를 써나갔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눈과 코를 괴롭혔지만 말 그대로 마감을 앞둔 잡지사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숨 가쁘게 달리다 보니 그달 마감의 끝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마지막 페이지 디자인을 마치고, 자체 검수를 끝내고 파일을 CD에 저장해서 인쇄소로 넘길 때의 쾌감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한 달을 꼬박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모든 분과도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언젠가는 원고에 펑크가 나면 채워줄 수 있냐는 제안도 해주셨다.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취하면 안 될 분위기였다. 마감을 끝내고 다 같이 회식할 때면 입보다 귀가 더 즐거웠다. 끊이지 않고 넘실거리는 달콤한 대화들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뭐랄까… 잡지 같은 사람? 주부 잡지 같은?”


뭔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 느낌은 아니지만, 여러 분야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편집장님께서 내게 전한 얘기였다.


‘잡지 같은 사람…?’


편집장님의 인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었다.


모두 26번의 마감을 경험했다. 매달 새롭게 만들어지는 잡지. 내가 디자인한 페이지는 마치 내가 낳고 기른 내 자식과도 같았다. 자랑할 만큼 뛰어난 수준과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안정된 디자인의 흐름에 기분이 좋았다. 핫뮤직의 일원으로 늘 자부심을 느꼈다. 록뿐만 아니라 팝과 가요까지 다루는 콘텐츠의 영역 덕분에 당시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핫뮤직 잡지의 존재는 누구나 알았다.


그 때문에 가끔 어떤 자리에서 핫뮤직 (서브) 디자이너라고 말하면 나를 보는 시선이 그전에 비해 조금 더 진지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유명한 음악 잡지를 만드는 내 두 손이 기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핫뮤직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내 인생에 더 많은 감동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관계의 확장이 이뤄지게 되었다.


관심을 두고 청취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 모임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훗날 그 모임을 이끄는 운영자가 되기도 했다. 앨범을 제작하는 레이블로 오랜 역사를 가진 지구레코드의 웹 사이트 제작 및 운영 관리를 4년 넘는 기간 동안 맡기도 했다.


이후 핫뮤직에서의 디자인 경험을 살려 새로 창간하는 음악 잡지의 메인 디자이너로도 업무를 이어갔다. A4 크기의 180여 페이지가 되는 컬러 잡지 한 권을 통째로 내가 디자인한 것이다. 같은 음악 잡지라 핫뮤직 정서를 많이 되살려 디자인을 꾸몄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즐겁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늘 가난한 현실만 되풀이됐다. 그러나, 배고팠어도 슬프지 않았고 궁핍했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기뻤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 행복했다. 모든 젊음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20대의 반 이상을 잡지 만들고 꾸미는 일로 보냈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약속할 즈음 핫뮤직 폐간 소식이 들려왔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막강한 온라인 콘텐츠 앞에서 한 달에 한 번 발행하는 종이 잡지의 생명력은 그야말로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투자와 광고가 몰리기 힘든 록 음악 잡지는 버티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 않겠는가. 결국 핫뮤직은 폐간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웹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베란다 구석에는 상자에 담은 잡지가 수두룩하다. 어려웠지만 짜릿했던 영화잡지 키노, 메인 디자이너로서 모든 페이지를 디자인했던 잡지, 수시로 사들였던 오디오, 인테리어, 건축, 패션잡지, 그리고 핫뮤직까지… 신혼 때는 책장에 가지런하게 두었지만, 두 아이의 아빠가 된 후에는 생활공간을 양보하게 되었다.


이사해서나 대청소할 때면 헌책방에 내다 팔라는 아내의 호령을 늘 단칼에 베이어버린다. 음악을 사랑한 사람의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 마치 일기처럼 그 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는 죽을 때 함께 묻어주길 바라는 인생 앨범을 손꼽는 대화를 종종 나눌 때가 있다. 나는 훗날 몇 장의 앨범과 더불어 핫뮤직을 넣어달라고 말하고 싶다. 여러 권의 잡지로 인해 관이 다소 무겁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록에 미쳐서 10대를 보냈고 그 시절을 자양분 삼아 20대를 온전히 열정과 도전으로 꾸몄던 내 인생을 그렇게 마감하고 싶다. CD를 플레이어에 올려놓고 눈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자면 언제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마지막에는 핫뮤직이란 이름처럼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라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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