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도서관에서 대여하던 책들의 주제는 대략 음악, 영화, 건축, 미술 등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마음으로 철학과 과학 분야 책을 읽었고, 아내의 등쌀에 못이겨 육아 책도 제법 읽었다. 그러다가 괜히 심술이라도 부릴라 치면 고르던 책이 '언어'에 대한 책이었다.
말하고 읽고 듣고 쓰는, 그야말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언어, 글, 한글, 국어 등등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매번 기대 이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주 가끔 커다란 주제 아래 비슷한 사례만 나열해서 마냥 지루한 책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대한 책을 읽고 나면 우리 글, 입밖으로 뱉어지는 말, 그 말을 하기 전에 가져야 할 생각, 심호흡, 고민, 상대에 대한 배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뜻밖의 책임감도 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런 면에서 그동안 읽었던 같은 주제의 책들 중에 손꼽힐 정도로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언어의 본질부터 전세계의 언어, 그리고 우리나라의 언어, 차별과 배제의 언어까지 다채로운 구성이 돋보였다. 소제목 하나의 분량도 적절했고, 충분한 사레와 저자의 연륜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는 읽자마자 머릿속에 팍팍 꽂힐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사대주의겠지만, 또 그 시대가 시대인만큼 미국,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단어 앞에 '양'자를 붙여 쓴 이야기들이 드라마틱하게 재밌었다. 양담배나 양주, 양상추, 양파, 양장, 양품점까지는 그러려니 했으나 양말과 양은냄비의 그 양은마저도 '양'을 꿰차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차별로부터 비롯된 장애인 비하 표현들, 남편을 잃은 여자를 뜻하는 미망인 등 시대착오적인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도 흔하게 쓰였던 말들 표현들이 문화가 달라지고 세대가 바뀌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과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는다. 줄임말이 범람하고 출처가 불분명한 외국어 표현들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현 시점에 노인을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글자와 단어에 국한되지 않고 문맥과 이해력까지 포커스를 넓히면 더욱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이렇게 된거라고 한탄하기엔 기성세대의 책임감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는 초등학생이 즐겨 부르는 노래, 대학생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달랐으나 지금은 전세대가 같은 장르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영향임이 틀림없으나, 다양성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지나칠 정도로 획일적이다.
공장에서 만드는 똑같은 모양의 눈깔사탕처럼 설탕만 잔뜩 들어간 차별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컨텐츠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여운 따윈 없는, 입에 넣는 순간 강한 단맛으로 짜릿한 유혹의 폭풍만 휘몰아치고 언제 있었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집집마다 백과사전, 국어사전, 옥편 쯤은 모두 갖췄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을 만드는 출판사도 더이상 개정판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이 정도를 고집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가까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언어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마치 이 책을 '언어사전' 정도로 비치해둘 정도로 가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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