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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May 17. 2024

출근하는 길

8시 10분. 반지하를 품은 다세대 건물. 2층과 3층 중간 즈음부터 스물두 개 계단을 내려와 골목길을 따라나선다.


노부부는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폐지를 주워 생활을 이어왔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깔끔하신지 리어카 주변에 종잇조각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웃에 누가 될까 늘 구석구석 꼼꼼하게 챙긴다. 할머니는 오른쪽 뒷다리를 절룩거리는 누런색 치와와 한 마리를 늘 품에 안고 다닌다. 잔소리가 많지만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머니 앞에서 인상을 찡그린 적이 없다.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느라 휴일이면 하루에도 몇 번을 마주친다. 



골목을 빠져나와 이면 도로로 들어서면 분주히 움직이는 미싱 소리가 들린다. 동대문 도매시장 가까이 있는 동네라 원단과 여러 종류의 옷을 실은 오토바이, 그리고 곳곳에 미싱과 각종 부자재 공장들이 즐비하다. 이제 막 출근길에 들어선 시각에 그들은 출근을 마치고 미싱을 벌써부터 돌린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늘 분주한 공간이다. 


이면 도로의 끝에는 허름한 야채가게가 하나 있다. 주인 할머니는 비가 세차게 오는 날에도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날에도 가게 문을 연다. 너무 춥지 않을까 걱정이 들지만 선뜻해드릴 무언가는 마땅치 않다.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는 할머니 눈빛은 아주 약간의 장난기가 서려있다. 그에 반해 늘 무표정하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 한번 보려면 골든벨을 울려야 할까 싶다. 



아주 가끔 움직이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생선 장수 할아버지도 있다. 일주일이면 하루 정도 마주치거나 먼발치에서 목소리만 듣게 된다. 삐쩍 마른 체구에 새하얀 직모가 몹시 단단한 느낌이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는 확성기를 거치지 않고서도 멀리 울려 퍼진다. 맨 목소리 하나로 수십 년간 장사해온 관록이 느껴진다.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지만, 비슷한 시간대에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역 옆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도 낯이 익어간다. 자주 보이던 어떤 사람이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걱정이 든다. 물어볼 곳도 없지만 다시 보는 그날까지 기다리는 일이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전부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면 그렇게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네모반듯한 계단을 따라 땅 아래로 몸을 숨긴다. 같은 시각 땅 위보다 백배는 더 분주한 땅속 세상은 혼돈 그 자체다. 과거엔 앞만 보며 걷는 사람들이 이제는 스마트폰만 보고 걷는다. 계단에서도 모퉁이에서도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그들의 시선은 손바닥만 한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높은 밀도에 잠시 몸을 맡기고 다섯 정거장 지하철로 이동한다. 남산을 가운데에 두고 정확히 반대편 동네로 향한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면 공원이라고 이름 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아주 작은 녹음 공간이 등장한다. 예전에는 노숙자들이 하룻밤을 보낸 공간이었고 지금은 높게 울타리를 치고 나무와 풀로 가득 채운 곳이 되었다. 콘크리트 사이에 그나마 진한 녹색을 볼 수 있는 고마운 공간에는 참새가 너무나도 많다. 맛있어서는 절대 아니고, 귀엽고 재빨라서 정말 좋아하는 새인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잠깐 참새를 바라보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다. 



길을 건너 얕은 언덕길을 따라 오른다. 한 집 건너 한 집, 거리를 가득 메운 커피 향기 사이로 달달한 디저트 빵집의 강력한 냄새가 걸음마저 멈추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냄새는 정말 엄청나다! 여자대학교 인근이라 아기자기하고 예쁜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게들이 개점을 앞두고 늦잠을 잔다. 노란색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역시 노란색 스쿨버스 한 대가 느린 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내 옆을 지나고, 사방에서 들리는 하하 호호 웃음소리. 젊음이 부러워지는 순간이 연속사진처럼 펼쳐진다.  


건물 앞에 이른다. 맘 같아선 뒤로 돌아 집도 아닌 다른 어딘가로 휙! 떠나고 싶다. 먹고살아야지. 살아야 또 먹지. 그래도 이렇게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고인물을 뛰어넘어 박제가 된 시점에 다른 일도 해보고 싶은데. 아내를 설득해 볼까. 월급날이 언제더라. 카드 값이. 아이들 학원비. 건물 앞부터 2층 출입문 앞 지문인식기까지 머릿속은 온통 복잡해진다. 


8시 40분. 출근 완료. 오늘의 출근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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