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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Jan 11. 2021

단어의 온도

지인 A의 실제 이야기다.

 

A가 명절에 친척 집에 갔다. 어쩌다 보니 친척 B와 재산은 얼마나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다. A는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주장했고 B는 돈은 적당히 있어도 되고 돈에 휘둘리지 않고 만족하며 사는 마음이 더 좋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쓸데없는 토론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C가 툭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A가 말하는 많은 돈이 B가 말하는 적당한 돈보다 더 적을 거 같은데?”

 

하여 실제로 까고 보니 B가 말했던 적당한 수준이 A가 생각하는 많다는 기준의 두 배 이상이었다는 웃픈 이야기.

 

세상에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는 없다. 단어는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한 의사소통에 필요한 사물과 관념에 대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똑같은 단어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심지어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단어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고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상대적이다. 고로 모든 단어도 상대적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쉽사리 깨닫지 못한다.

 

나 또한 사람마다 단어는 상대적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스무 살 이후에 두 차례의 십자인대 파열과,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갈 일이 많았다. 확 죽어버릴까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픈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를 앓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나만큼 아파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똑같은 질환이라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구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에 예민하구나, 불쌍하다 생각하고 넘어갔다. 이후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읽고 생각이 온전히 정리가 됐다. 책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똑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 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은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알랭 드 보통은 보통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단어의 온도'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똑같은 단어도 사람마다 그 단어를 사용하고 체감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의미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종종 대화를 끊고 단어 정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잠깐. 우리 단어 정리 좀 하고 가자. 네가 생각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정확히 뭐야?"

 

이는 남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도 있지만 내 말을 오해 없이 전달하기 위함이 더 크다. 


어려서부터 단어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항상 사전을 끼고 살았다. 나는 내가 어휘력이 딸리는 줄로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준이 남들보다 더 엄격한 듯하다. 단어가 음식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대충 씹고 넘겨도 소화가 된다면 나는 단물이 나올 때까지 잘게 잘게 씹어야지만 소화시킬 수 있다. 요즘도 공부할 때, 일할 때, 아니면 단순한 일상 속에서도 확실하게 모르는 단어는 반드시 사전에서 찾아서 단어의 활용법까지 숙지하고 넘어간다.

 

단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만큼 내가 쓰는 단어들의 온도는 단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더 뜨겁거나 차갑다. 게다가 단어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나만의 생각을 그 단어에 투여함으로써 재해석해버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단어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친한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날 잘 모르는 사람은 오해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다. 결혼 전 회사 동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는 자리였다. 후배가 아내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냐고 물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으레 있는 질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특별한 계기는 없고 그냥 조건이 맞아서 결혼하게 됐어요."라고 답했고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 넘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가는 길에 동석했던 동기가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말하지 마. 사람들이 오해해." 머리가 띵했다.  내가 또 한 번 불필요한 오해를 샀구나.

 

내가 생각하는 결혼의 조건이란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했다. 돈, 외모, 능력, 경제력, 집안과 같이 결혼정보 회사에서 회원의 등급을 매길 때 사용하는 ‘조건’이 아니라 사랑, 비슷한 육아관,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 화목한 가정, 나를 좋아해 주시는 장인 장모님, 그 외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적인 것들이 모두 내가 말한 '조건'이라는 단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맞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나 개그코드, 심지어 속궁합이 잘 맞는지 등도 다 일종의 조건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결혼에 맞는 조건이라 하면 정량화 가능한 객관적인 지표를 일컫는다. 그 후배는 ‘뭐 이런 사람이 있지? 이렇게 대놓고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고 말하는 거면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거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이 뿐일까. 이제까지 그 많은 고민들을 무색하게 만들 주의 깊지 못한 단어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으며 살아왔을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비난과 험담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항상 나쁜 결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내 주위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날 오해하고 멀리할 법도 한데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며 이제까지 나를 이해해 준 사람들이 대단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다른 이들의 말을 한 번 더 이해해보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최근 내가 자주 들어가는 직장인들의 온라인 게시판에 익명의 게시자가 ‘인생이 심심한데 아이를 가지면 좀 나아질까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라왔다. 심심해서 낳은 아이가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식의 악플들이 순식간에 쌓였다.

 

하지만 난 그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내 마음대로 이해했다. 심심함이라는 감정은 사람마다 느끼는 상황이 다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재밌는 건 게임, 운동, 취미, 술자리 같은 게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한다고 느낄 때 또는 뭔가를 성취할 때 인생이 재밌다고 느낀다. 즉 나는 내가 배우는 것도 없고 성취하는 것도 없이 인생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낄 때 인생이 심심하고 무료하다고 느낀다. 그럴 때 인생의 권태기가 온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그 인생의 권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십 대 중반에 취직을 하고 서른 즈음이 되자 회사에서 더 이상 새롭게 배울 것이 많지 않게 느껴졌다. 회사 외적으로 새로운 걸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배드민턴을 배워 대회에 나갈 정도로 매일 쳤고, 방송통신대학에 등록해 학위를 따려고 공부도 했으며, 어릴 때 되고 싶었던 만화가의 꿈에 도전하고 싶어서 미술 학원에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독서는 이미 학생 때부터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느낌이 없었고 글을 쓰고 싶은데 막상 쉽게 쓸 수 없어 필사에 좋다는 책들을 사서 필사도 해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성취감을 느끼기엔 그것들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회사를 다녀야 했고, 연애도 해야 했고, 친구들과 술도 먹어야 했고, 맛있는 것도 먹어야 했고, 집안일도 해야 했고 잠도 자야 했다. 미술은 이래서 미뤘고 운동은 저래서 관뒀다.


그런 포기들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정체된 인생을 돌파해나갈 수 있는 한 방을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그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결혼하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내 안에서는 수도 없는 갈등이 있었다. 이때 내가 느끼던 인생의 권태기가 결혼을 할 수만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결혼을 결정할 때 결혼을 이유들과 하지 않을 이유들을 두고 끝까지 고민한다. 그 이유들은 자기 자신이나 배우자뿐만 아니라 가족, 배우자의 가족, 커리어, 부동산 등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련된다. 이때 고려해야 하는 모든 상황이 만족돼서 결혼을 해야겠다 결심하는 경우는 드물다. 결국 결혼을 안 할 이유보다 결혼을 할 이유가 더 크면 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비단 결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가 뭔가를 하기로 선택하는 이유는 그걸 할 이유가 안 할 이유가 더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 인생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성취해 나가는 재미가 있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재미에 제약이 생긴다고 느꼈다면 애초에 결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연애보다 일을, 가정보다는 성공을 더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내가 나와 결혼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그런 재미에 심취하는 정도가 연애마저 시간이 아깝다고 느낄 정도였다면 애초에 아내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속 사정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심심해서 결혼했어요' 하면 엄청난 뭇매를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심심해서 결혼을 한다는 표현이 통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심하다는 단어 뒤에는 친구를 만난다 영화를 본다 취미를 즐긴다는 표현이 따라와야 한다. 그것이 심심하다는 단어의 일반적인 온도인 것이다.


심심해서 아이를 가져볼까 한다는 글을 보고 잘은 모르지만 작성자도 내가 결혼 전 느꼈던 비슷한 인생의 권태기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작성자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그동안은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루면서 살았다. 작성자에게는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고, 언젠가는 배우자와 사랑스러운 아이를 갖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심과 아이를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이를 가질 시기를 조금씩 미루고 있었다. 노력 대비 성취가 줄어들고 일에 대한 의욕이 예전만 하지 않던 어느 날 문득 아이를 가져볼까 고민을 진지하게 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생각 없이 본인만의 표현으로 그 고민을 게시판에 올린 것이다. 글에는 작성자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미 심심해서 애를 가진다는 제목에서 화가 잔뜩 났고 게시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리고 무책임한 부모 아래에서 고생할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작성자를 비난한다. 심심하다는 말에 대한 단어의 온도 차이 때문에 작성자도 독자도 모두 상처 받는다. 의사소통에서 발생하는 오해의 원인은 7할 이상이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작성자를 이해하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매번 내 실수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사람들의 케이스를 타산지석으로 삼으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단어의 온도를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 솔직히 '나를 알아줄 사람은 어찌 됐든 날 알아준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건방진지 잘 안다.


내 단어는 열기와 냉기가 가득하다. 단어의 온도를 조절해야겠다. 남들한테 사랑은 못 받더라도 굳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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