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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Jan 24. 2021

회사 게시판에 올린 글

그동안 속으로만 뒤에서만 불평불만하는 거에 지치는 와중에 회사에서 직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TF를 만들어 회사 평가, 보상 체계에 대해 검토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맡긴다고 하여 제 의견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1. 저는 평가/보상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동안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적을 뿐입니다. 제 의견이 다소 투박할 수도 있고, 반작용과 부작용을 수반할 것입니다. 제가 의견을 낸다고 해서 당장 제도가 될 리 만무하기에 반작용, 부작용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TF에서 고민해주세요.

2. 글 중간중간에 제 생각을 현실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이는 분들에 따라 다소 시니컬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대해서, 특정 부서에 대해서, 특정 직급에 대해 결코 냉소적이거나 비꼴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3. 저는 제 자신을 현 평가/보상 체계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평가와 보상 중 보상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보상은 쉽습니다. 잘 한 사람한테는 많은 보상을, 못 한 사람에게는 적은 보상을 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보상체계입니다.


우리 회사의 보상 체계는 그 방향성에서 부합합니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조기 승진, (해외) 교육 기회, 해외 근무, 동급 대비 수천만 원에 달하는 더 많은 보너스 등의 보상을 줍니다. 평가가 안 좋은 사람들에게는 동급 대비 현저히 낮은 보너스, 낮은 연봉 인상률, 승진 누락 등의 불이익을 주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더욱 확실하게 잘 한 사람에겐 더 많은 보상이, 못 한 사람에게는 더 적은 보상이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누군 정말 잘했는데 승진 대상이 아니라 양보해야 할 일도 없고 누구는 잘 못했는데 승진 연차니까 더 챙기는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자신이 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뭐니 뭐니 해도 회사원에게 최고의 동기 부여 수단은 보상입니다.


단, 현재 평가 체계에서는 안됩니다. 우리 회사의 평가체계는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습니다. 


평가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평가 기준이 필요합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일을 잘해야 하는 건지, 인성이 좋아야 하는 건지,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높아야 하는 건지 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일을 잘한다는 건 무엇인지, 보고서 작성 페이지가 많은 것인지, 발생시킨 매출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정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같은 부서 안에서 기준도 중요하지만 부서 간 평가 기준도 중요합니다. 전략부서에서 100장의 보고서를 찍어내는 것과 재무부서에서 실수 없이 공시자료를 만드는 것과 마케팅에서 100억의 매출을 일으키는 것 중 어떤 게 더 높은 성과인지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Job 간의 성과를 어떻게 비교할지 명확히 정해져야 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성이 평가의 주요 요인이라면 인성이 좋다는 근거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정립되어야 하며,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중요하다면 로열티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정의돼야 합니다. 


모든 평가 기준의 정의에는 직급과 연차도 고려돼야 합니다. 보고서를 많이 찍어내는 게 실적의 근거가 된다면 부장이 열 장을 찍어낼 때와 대리가 열 장을 찍어낼 때 평가는 달라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부장이 대리보다 더 많은 연봉과 보너스를 받는다는 건 부장이 당연히 대리보다 더 좋은 실적을 내야 한다는 전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정의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는 보험영업이나 펀드 매니저처럼 각자의 역량이나 노력이 명확한 성과로 이어지는 회사가 아닙니다. 즉, 우리 회사 직원들의 성과는 숫자로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영업 조직마저 개인의 성과를 숫자로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매년 말 실마다 팀마다 작성되는 수십 장의 KPI 보고서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회사가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돈은 장치가 벌고 업무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잘난 구성원도 아무리 못난 구성원도 그 실적의 차이를 숫자로 명확히 가늠하기 힘듭니다.


제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평가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일정 비율은 실 내 직원 간의 평가, 일정 비율은 팀 내 직원 간의 평가, 그리고 나머지 비율을 직속 리더에게 평가를 맡깁니다. 다른 조직 구성원의 추천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을 선정하여 가산점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누구 한 명한테 잘 보이기보다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게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들의 평가의 결과인 만큼 납득하기도 쉽지 않을까요. 각자의 가치를 시장에 맡기는 겁니다. 시장논리에 맞게 보상도 주어지는 겁니다. 


평가가 무슨 인기투표냐고 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 사람들의 날카로운 합리성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인기투표라고 생각합니다. 투표권이 임원과 팀장한테만 있다는 게 다를 뿐이죠.


투명성을 높이는 방법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공개하면 됩니다. 공개 정도에 대해서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현재의 평가 체계를 유지하든, 구성원들에게 서로 간의 평가를 할 수 있게 만들든 그 과정과 결과를 공개하는 겁니다. 대신 구성원들 간의 평가가 이뤄지게 된다면 익명성은 보장이 되어야겠지요. 만약 지금과 같이 리더만이 평가자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평가의 이유와 결과를 의무적으로 공개하게 만들면 됩니다. 과정과 결과를 공개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평가권자들은 스스로 공정해지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효과도 생깁니다. 최소한 누구는 승진 대상이고 누구는 아니라서 평가가 바뀌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죠. 실제로 그렇더라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한 성의를 보여야겠죠.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정이 많은 거지 바보는 아니지 않습니까.


공개에 대해 구성원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하는지 안 하는지는 전수조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사회에 전수조사 그거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 양보해서 기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3일 안으로 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팀원들 의견 취합 못하는 리더에게 평가에서 불이익을 주고, 빨리하는 리더에게 가산점을 주면 됩니다. 그럼 3일이 멉니까. 반나절 만에 됩니다.


공정한 평가일수록 평가가 좋은 사람은 공개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평가가 안 좋은 사람은 공개에 대해 반대할 것입니다. 만약 평가가 좋은 사람도 평가가 공개되는 게 부담스럽다면, 그러니까 정작 본인도 자신의 평가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면 그 평가 체계는 무언가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의 방법들은 반작용도 부작용도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지금의 평가체계보다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모든 체계에 장단이 있다면 결국 선택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깊이 있는 고민과 분석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부디 이번에 평가/보상 체계 검토,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TF가 이전에 변화를 외치던 집단(?)에서 단지 이름만 바꾼 무언가로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TF에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서 억지로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습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본업이 있는 사람들,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면 평가와 보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억지로 모아다가 이야기해봤는데 역시 답이 없더라 하는 식의 결론은 안되게 해 주세요. 


답이 없다면 차라리 질문을 바꿔가면서 구성원 대상 전수조사를 수십 차례 해주세요. 현재 평가와 보상체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밝혀주시기만이라도 해주세요. 솔직히 현재 체계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고 불만족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관심 편향이라고 하지요. 만족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불만족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리면 사람들은 대다수가 불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의외로 현재 체계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뭘 바꾼다면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하고 싶은 TF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돼? 생각하신다면 안 하시면 그만입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퇴근부터 생각하는 회사원으로서 내 일하기도 싫은데 내 일도 아닌 일 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 백분 이해합니다. 


TF를 주관하는 부서는 결과를 떠나 TF 참여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상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사에서 자기 일이 아닌 다른 일을 맡았다는 건 그 자체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음번에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서 사람 모으고 다닐 일도 없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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