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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Jan 25. 2021

퇴사 말고 희망퇴직

사내식당이 있음에도 무조건 법인카드(이하 법카)로 점심을 사 먹는 선배 A가 있었다. 회사원의 3심 중 하나가 점심이라는 둥 일 년에 많이 먹어야 365번 밖에 안 먹는 점심이기에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둥 점심식사에 대한 철학이 있는 선배였다. 당시 팀장은 A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해서 A가 없는 자리에서 그가 매일 법카로 몇 만 원짜리 점심을 먹는다고 욕을 했었다. 어린 마음에, 그것보다는 나도 A를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했기 때문에 먹을 거면 지 돈으로 먹지 뭐가 저렇게 당당해하며 욕했다.


A는 허구한 날 희망퇴직하면 자기는 돈 받아서 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대놓고 돈 왕창 받아서 퇴사하겠다는 말 아닌가. 나름 회사원으로서 회사와 동료들에 대한 ‘상도’라는 게 있다고 믿던 시기라 이건 '객관적으로' 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똑같은 짓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A보다 나이도 연차도 한참 아래라는 점에서 가히 청출어람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출근하면 커피를 사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지 않는 이상 법카로 커피를 사 먹는다. 그것도 최고급 스벅 아아*로.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보통 월요일에 사내 네트워킹을 빙자하여 법카로 평소에 자비로 사 먹기 아까운 적당히 비싸고 맛있는 점심을 사 먹는다. 일부러 사 먹는 건 아니고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업무 효율성(=일 할 마음)이 오르지 않는다. 일요일 밤 잠자리에 누울 때 ‘내일 법카로 맛있는 거 먹어야지’ 생각하며 출근할 생각에 심란한 마음을 달랜다. 그렇게 회사에게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으며 산뜻하게 월요일을 시작하며 남은 일주일을 열쒸미 일한다. 열쒸미. 


(*)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희망퇴직도 똑같다.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떠났던 첫 번째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내가 퇴사한 후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시행하면 너무너무 너무 짜증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못 가지는 것도 싫지만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건 더 싫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한 번의 구조조정이 있었다. 당시 지금의 나보다 연차도 낮고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대거 희망퇴직을 신청하여 목돈을 받아 나갔다. 그중에서는 안 그래도 퇴사를 하려던 사람이 때마침 수억 원에 달 하는 퇴직금을 받아나간 일화와 그때 퇴직해서 집을 산 사람들의 일화가 꾸준히 회자됐다. 나도 이왕 나갈 거 목돈 좀 받아서 나가고 싶다. 일부는 쓰고 대부분은 투자한 다음에 잠시 쉰 후 다시 취업을 하든가 하고 싶다. 부동산은 너무 뛰었으니 주식을 사서 쟁여야겠다.


언젠가 회사의 높은 임원이 아침 조회 시간에 이런 말을 했었다.


“나이 먹은 사람이 하는 행동을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앞으로 걸어갈 길입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 하는 행동을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이제껏 걸어온 길입니다.”


당시 한창 회사 만사를 꼬아서 보던 나는 저거 저거 또 임원이나 돼가지고 자기변명하고 앉았네 생각했지만 멘트 자체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단히 내 뇌리에 박혀있다.


좋은 길, 꽃길 걸어간 선배들 많은데 굳이 구린 길(적어도 당시 구리다고 욕한) 걷는 선배를 따라간다는 게 참 인생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회사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자는 정신은 잘 이어받은 것 같다. 생각해보니 A는 남들이 잘 모르는 복지나 제도를 활용해서 한 푼이라도 더 받아먹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의 연구성과를 마음껏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다른 건 다 별로였지만 그건 좀 괜찮았던 것 같다. 


좀 더 나이가 먹고 연차가 차고 무엇보다 A와 똑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가 이해되기도 하지만 역시 다시 A와 엮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혹시 또 다른 신박한 방법으로 회사에 빨대 꽂아 쪽쪽 냠냠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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