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by 고베리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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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이후 첫 출근이었던 목요일 오후에는 회의가 많았다. 복직이 불과 일주일 전인데 출근하면 '애써 시간 내어' 산책을 하겠다는 다짐이 벌써 무뎌졌다. 때마침(?) 산책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이어진 회의는 오늘은 걷지말라는 하늘의 뚯이구나 생각할 좋은 핑계거리였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 불현듯 목과 허리가 찌뿌둥해졌다.


'그래. 내가 걸으려고 했던 이유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 건강하려고 였지...'


(*) 나 : 목 디스크, 허리디스크 모두 보유자. 무릎 십자인대 (무려) 2회 파열자. 연골 1회 파열자.


그리하여, 칼퇴를 하고 광화문에서 종로 5가 역까지 걷기로 했다. 지하철역으로 치면 2정거장이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며 사뿐사뿐 걷다 보니 종로 젊음의 거리(과거 피아노거리)를 지났다. 나름 나에게는 종로의 랜드마크이자 만남의 장소였던 종로 지오다노가 다이소로 변해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종로를 지나며 정말 많은 곳이 바뀌었구나 생각했다. 코로나 탓인지 세월 탓인지 모르겠다. 둘 다겠지.


추억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2.jpg 광장 시장 앞에서 로또를 샀다


종로3가역을 지나 유흥가를 벗어나니 익숙함보다 낯섦이 피부에 와닿았다. 처음은 아니지만 한두 번 밖에 걸어보지 않은 거리에서 잊고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소개팅한다고 갔던 카페. 친구랑 시간 때운다고 갔던 극장. 회사 사람들이랑 회식으로 갔던 노래방. 신입사원 때 회사 선배 발기부전제 심부름으로 갔던 약국. 오피스텔 전세대출 받으러 갔던 은행. 모두 단 한 번만 가본 장소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장면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만) 함께였던 인연들이, 순간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갇혀 있는 '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휴, 저렇게나 어렸는데, 고생했구나.' 마음이 아련해지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잊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겪어오며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놀랐다. 매일 생활하는 집, 동네, 회사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재진행형으로 속해 있는 공간에는 당장 추억이 깃들 수 없음을 깨달았다. 추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억이 내 안에 저장되어 충분히 숙성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그 추억을 함께 했던 사람을 만나거나 그 추억이 깃든 장소에 다시 갈 때 '아 그때 그랬었지!' 하며 추억은 뿅! 하고 소환된다. 그렇지 않으면 추억은 내 안에서 숙성만 되다가 영영 잊혀져버린다.


'추억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방 종로 5가에 다다랐다. 뭔가 아쉬웠다. '이렇게 된 김에 동묘까지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묘는 실제로 한 번밖에 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랑 GD가 함께 동묘를 가는 편이 있었는데 그게 너무너무너무 재밌고 기억에 남아서 그런 것 같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종로 5가 역을 휙 지나쳤다. 하지만 그때 나는 종로 5가에서 전철을 탔어야 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지 우리는 많은 경우 지금 우리가 조금 부족한지, 적당한지, 과한지 알아채지 못하고 다 겪고 나서야 그때 더 할걸, 또는 그때 멈출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다 보니 조금 부족한 거보다는 조금 과한 게 낫고,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할까 말까' 할 때는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만 그 당시에는 종로 5가 역과 그다음 역 사이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걸어보진 않았지만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수도 없이 지나다닌 거린데 얼마나 거리가 먼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동대문을 지나서 동대문역이 보고 나서야 '아 애초에 동묘까지 걷는 건 무리였구나' 하며 미련 없이 지하철을 탔다.


추억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3.jpg 노을을 어깨에 엎은 똥따먼. 노을 어깨뽕. 어깨 노을뽕인가.


한 번 해봤으니 당분간은 퇴근하고 동대문까지(또는 동묘 앞까지) 걷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추억도 너무 자주 꺼내보면 닳아 없어진다. 한 번 꺼내본 추억은 다시 한번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은 한 번 걸어봐서 굳이 다시 걸어봤자 새로움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종로 5가와 동대문 사이 길은 왠지 모르게 거칠고 와일드하여 무서웠다... (길에 마스크 안 쓴 사람도 너무 많았다...)


오히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청량리 도착 몇 정거장 전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 볼 생각은 있다. 아마 이건 날씨가 많이 추워지기 전에 한 번은 할 듯하다. 그때는 미리 작정하고 러닝화도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반드시!! 노트북도 회사에 두고 나올 테다(★ 중요한 건 별 표시 밀줄 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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