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워킹

by 고베리슬로우


가을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이게 진짜 10월 초의 날씨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더웠는데 이번주는 일주일 내내 내린 비와 함께 날씨가 사뭇 쌀쌀해졌다.

대대로 가을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가 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독서의 계절.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드는 전어의 계절. 우리 집 강아지와 나 같은 사람에게 가을은 털갈이의 계절이다. 털이 빠진다. 머리털이 빠진다.

27살, 6월 어느 아침이었다. 뭔가 머리선이 달라졌다는걸 처음 느꼈다. 출근하자마자 같은 팀의 '탈모선배'를 회의실로 불렀다.

"과장님, 저도 온 거 같아요."

그 과장님은 평소 "난 대학생 때 시작했다. 만약에 오면 말해라. 내가 잘 하는 선생님 알려줄게."라는 말을 심심찮게 했었다. 귓등으로 듣고 넘겼는데 내가 과장님 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 외칠줄이야.

"고려대학교에 잘 하는 선생님이 있다. 나도 그 선생님한테 정기적으로 치료 받는다."


​그 길로 나는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고려대학교로 질렀다. 자리를 비워서 눈치가 보인다거나 바쁜 업무가 있다거나 그런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빠지는 머리 앞에서 그 딴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탈모와의 사투는 어느덧 십년이 됐다. 이 말을 들으면 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내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된 이유 Top 3' 중 하나가 탈모다. 실제로 당시 내 두피 케어를 해주던 선생님도 진담 반 농담 반 이왕 이렇게 된거 빨리 결혼하라고 그랬다.

탈모를 늦추고자 참 많은 노력을 했다. 탈모에 좋다는 음식도 많이 먹었다. 내 가방에는 항상 볶은 검은 콩이 있었고 회사 탕비실에 있는 녹차는 내가 다 먹었다. 탈모에 좋다는 영양제(비오틴, 엘시스타인 등)도 먹기 시작했고 미녹시딜도 사서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두피케어센터에서 받은 '두피열 내리는 앰플'은 시시때때로 바르는게 좋다고 해서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뿌리곤 했다.



지금에야 탈밍아웃한지도 오래되고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해서 이렇게 쉽게 말하지만 그 때는 탈모 자체도 스트레스였지만 주위사람들에게 숨겨야 한다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비를 머리에 떨어지는 염산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건 모두 쓰레기'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내가 탈모 앞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건 모두 독'이라고 여겼다. 우산이 없으면 절대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머리에 빗방울이 한 두방울만 맞아도 당장 탈모샴푸로 머리를 감지 않으면 미칠것 같은 강박증과 불안증을 겪었다.


​이번주 일주일 내내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한켠으로는 '걸어야 하는데 비가 오니 걷지 못하겠네'라고 생각하면서도 '아, 나도 이제는 비에서 많이 자유로워졌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비가 퍼붓지 않는 이상 한 두 방울, 세 네 방울 정도는 맞으면서 걸었다. 심지어 그렇게 비를 맞고서 몇 시간동안 머리를 감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 내심 미루기까지 했다. 더 이상 비에 대해, 그리고 탈모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편하긴 하지만 그 이유가 나이가 먹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하기도 하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가보다.

가끔, 아니 종종, 아니 자주 내 머리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머리가 이렇게 잘 관리될 줄 알았으면 일찍 결혼하지 말껄.' 그 때 그 두피 케어 선생님이 자기 돈 벌려고 그렇게 날 겁주지만 않았더라면... 난 정말 그 때는 일이년 안에 대머리가 되버릴 줄 알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 무심코 앞머리를 올렸는데 양쪽 이마 끝이 힘차게 쳐올라가고 있는 걸 보고 '역시 일찍 결혼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했다.

탈모라는 게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안빠지는건가 싶을 때 갑자기 훅 하고 한 웅큼 머리를 뺏어간다.


​평소보다는 많이 걷지 못 했지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는 걸 감안하면 꽤 많이 걸었다. 이번 주에 못 다 걸은 건 다음주에 마저 걸어야겠다. 그리고 슬슬 겨울에는 어떻게 걸을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뭐 벌써부터 고민하냐 할 수도 있지만 당장 한 달 뒤면 추워진다. 금방 있으면 올해도 끝이다. 2021년도 슬슬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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