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누구는 그걸 무시하거나 이겨내고, 누구는 거기에 굴복하고 매몰된다.
나는 내 부족함에 대해 자격지심이 있고 그것이 내 삶의 동력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까지 그런 생각을 했고 종종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것도 기억나는데 그 감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부족함은 분명 있었지만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자격지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의 대상은 상황에 따라 달랐다.
생존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아프고 상처받을 것 같은* 두려움.
사랑하는 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등등.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뭘 봐도 사랑하듯 두려움이 넘치는 사람은 뭘 봐도 두렵다.
(*) 모든 두려움 앞에 '같은'이 붙는 이유는 그 두려움들은 모두 발생하지 않은 상상 속의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실제의 고난 앞에서는 의연하게 대처해왔다.
난 내 부족함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지금까지 그 두려움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남이 봤을 때 나는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아 보였을 수 있지만 나는 산꼭대기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올라가지 않으면 도태되라는 두려움에 도망치며 살아왔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살면서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누군가에게 채찍질당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즐기기까지 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쫓겨서라도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인생의 고달픔 정도는 '결과론적으로' 미화할 수 있다.
요즘에는 예전만큼 두려움이 없다. 대한민국의 당당한 소시민으로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이뤘기 때문이다. 취업, 결혼, 그리고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이쁜 우리 두 딸. 다들 하는 거라고 별거 아닌 거들이 아니다. 나에겐 그것들이 전부였고, 전부고, 앞으로도 전부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있지만 이루기 전에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비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동력이었던 두려움이 옅어진 만큼 삶에서 발전이 없어졌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산 정상을 향해 달리다가 지금은 산 중턱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격이다. 아무리 좋은 절경이라도 계속 보면 지겨운 법. 새로운 동력으로 다시 뭔가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소원을 빌듯이 그 동력이 평생 날 갉아먹은 두려움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