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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Dec 17. 2020

나는 '무엇'인가.

원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일단 웃자고 한 마디를 해보자면, 흔히들 말하는 대로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인문학이 발달한 이유는 '놀 게' 없기 때문이다. 요즘 '놀고'있는 나는 할 게 없고 나갈 수도 없어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철학책을 접하게 되었고 자아를 성찰해 보는 시간가져보게 되었다. 관점의 차이인데, 나한테는 아주 건설적인 미래를 위한 비전을 생각하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냥 빈둥거리는 시간이다.




원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했다.


진정한 자유함을 느끼는 나에게서 책임감을 발견하고 그 책임을 완수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내 가치를 인정해 주자. 나 스스로부터 나를 온전히 바라보자. 남에게 보이는 가면을 쓴 자아가 아닌, 진짜 나의 모습과 마주 보고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자. 그리고 나를 안아주자.


지금 나의 불만족, 슬픔, 화남, 지침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도 내 안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가장 나 다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진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느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등에 대해서 쓰려고 했었다.




그러다 보니 왜 나는 나를 돌아보는 것에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게 할까? 나의 잘못을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나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나의 실수, 단점, 약점들이 드러날까 봐서? 내가 못난 사람임을 인정하는 게 싫어서. 나 스스로에게 실망할까 봐.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혹은 그렇게 되기라도 할까 봐.


그런데 나 혼자서라도 그런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없다면, 결국 나는 계속 공허해지고 말 것이다. 그런 나를 감추고 숨기며 사람들 앞에 마주 서야 하니까. 나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내 속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 나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내재된 화나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 실현되지 못하는 꿈들이 나를 억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억누르고 감쳐두었던 감정들이 일어나 나를 좀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갔더니 나한테는 안 좋은 거였던 거지. 너 많이 힘들었구나. 많이 서운했구나. 그동안 많이 아팠겠다. 그건 정말 화났겠구나. 속상했겠다. 이제 괜찮아. 지금 까지 잘해왔잖아. 표현하지 못해도, 아무도 몰라줘도 너 스스로 잘하고 있잖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지, 무서웠지. 그래도 잘했다. 정말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며 나를 토닥여주자.




사랑만으로는 안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더 깊은 상처를 남기니까. 그런데 엄마에게 받은 상처도 생각해 보니, 엄마라고 일부러 그랬겠나 싶더라.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었잖아. 엄마를 처음 해보는 거니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자식이 처음이라 엄마 아빠 상처 많이 줬잖아. 아내에게 받은 상처를 생각해보니, 아내도 많이 이해해주고 있잖아. 나 같은 놈 만나서 그래도 지금까지 서로 잘 위해주고 아껴줬잖아.


내가 혼자서 울 때 엄마도, 아내도 혼자서 울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아팠다. 내가 아팠을 때 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상처는 받을 수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어서 사랑 그거 나를 별로 치유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팠다고 생각하니 내가 아플 때 보다 더 아픈 것은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는 것인가 보더라.




아내와 장난을 치다가 바닥에 누웠는데 책장 아래에 진짜 운명 같은 책이 놓여있었다. 언젠가 다시 읽어보아야지 하고서 놓아둔 책. 심지어 내가 산 책도 아니고 아내가 아가씨일 적에 사둔 책. (톨스토이 단편선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2012, (주)미르북 컴퍼니) 마치 고대 유물이라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피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읽어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님이 천사 미하엘에게 알아오라고 한 질문 세 가지.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자신만을 위하여 따로 떨어져 살길 원하지 않으시고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길 원하셨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간다.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이 주는 또는 그 사랑으로서 가지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닫고, 내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나 스스로를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우리 안에 있다고 해도 결국 깨닫고 사용하는 사람만이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삶. 그것이 사랑을 경험하는 삶이 아닐까.


내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사랑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각자에게 더 필요한 게 무엇인지가 아닌, 서로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서로 돕고 협력하고,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진짜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오늘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나?


오늘을 사는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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