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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Nov 06. 2020

책 읽어 주세요.

아빠 말고 엄마가, 엄마 말고 아빠가.

올해 3월쯤 그러니까 딸이 만 53개월이었을 때 일이다.


거실에서 둘째를 본다고 (말을 하고 놀고 있는) 아빠를 제쳐두고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설거지로 바쁜 엄마에게로 가서


"엄마, 책 읽어 주세요" 한다


참 신기한 것은, 딸은 책 읽어주는 것을 참 좋아한다. 더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를 24개월 무렵 때도 블루 레빗 생활습관 12권 세트를

이미 다 외우고 있으면서도 1권부터 12권까지 서너 번은 읽어줘야 잠자리에 들었었다.

처음에는 그런 딸이 영재 같고 대견하고 고마워서 다 읽어줬는데, 며칠 뒤부터는 피곤하고 귀찮고 지루하고 그래서 내용도 대충 하거나 바꾸고 목소리도 바꿔보고 그러면 그게 더 재밌는지 그런 날은 한번 더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그 책을 달달 외우면서도 책에 나오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자꾸 울면서 말하고 동생한테 양보도 안 하는 거 보면, 지식과 적용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다.


"엄마는 지금 좀 바쁜데, 아빠한테 읽어달라고 하면 안 될까?"


엄마는 책도 안 읽어 주고 뭐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말했지만, 나는 좀 억울했다.

책을 책장에서 뽑자마자 엄마에게로 달려갔으니

나는 읽어주려는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딸이 대답했다.


"아빠가 읽어 주는 건 싫어."

"왜?"

"아빠는 자꾸 나보고 읽어보라고 한단 말이야."


사실 어느 날부터 받침이 없는 한글은 애가 조금씩 읽길래, 책을 읽어줄 때마다 일부 단어들, 예를 들어 "해주세요, " "할머니, " "할아버지" 같은 평소 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나 읽을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은 직접 읽어보게 했더니 그게 싫었나 보다.

어쨌든 아내의 눈살에 매우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에 잘 타일러서 불렀다.


"일로와 아빠가 너한테 안 시키고 다 읽어줄게."


아이는 현명해서 날 믿지 않았지만 바쁜 엄마를 어찌할 순 없으니 쭈뼛쭈뼛 다가왔다.

책을 펼치고 내가 물었다.


"XX아, 안 읽어도 좋은데, 그래도 이렇게 매일 읽는 책들은 네가 이미 내용을 대충 알잖니, 게다가 이런 어린이 책들은 그림도 많고 그림에서 대충의 내용을 이미 설명해 주고 있는 경우가 많아. 지금도 봐봐 이 토끼의 표정과 지금 하고 있는 모습에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 거 같아?"


비록 안 시킨다는 약속은 어겼지만, 읽어보라고는 안 했으니 완전 거짓말도 아닌 채로 난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음... 괜찮아 봐봐 일단 이런 표정을 봤을 때 이렇게 할거 같은데, 진짜 그럴까?"


난 일부러 원래 내용과 다른 생각을 온전히 그림만 보고 추론해서 말해보았다.

그런 생각이 틀려도 좋다는 걸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렇게 몇 장을 넘기며 아이와 추론과 확인 작업을 함께 한 후 지루해하는 모습에 그다음 장부터는 그냥 다 읽어 주었다.




며칠 전 아이가 혼자 책을 보고 있었다.

꽤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보길래, 벌써 한글을 저렇게 읽나? 싶어서 물었다.


"XX아, 뭐해? 책 읽는 거야?"

"응, 그림을 보면서 어떤 내용일지 생각해 보고 나중에 아빠가 읽어줄 때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하는 거야."


뭔가 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요즘에 브런치에 글을 써보겠다고 작가 신청을 하고 나서 막상 할 말이 즉, 어휘력과 표현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집에서 틈나는 대로 독서를 했다.

내가 독서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내가 제시한 생각하는 법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요즘은 딸아이가 아빠를 기다려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가급적이면 등장인물별로 목소리로 달리해서 구연동화처럼 읽어주기도 하고

작가, 삽화가의 이름과 설명까지 모두 읽어주면서 그 작가의 전작은 무엇이었는지

그 작가의 다른 책 시리즈가 또 우리 집에 있는지,

그 작품이 마음에 들었으면 그 작가의 다른 책을 다음에 또 사보자는 둥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또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진 아이와 삽화가의 화풍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원래 그림을 이렇게만 그리는 분인지, 다른 작품에서 이분의 그림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작품과 이 작품의 화풍이 같은지, 그럼 주로 어떻게 선을 표현하고 어떻게 색을 쓰는지 등등.


아마 반도 못 알아듣겠지만 가끔 제법 그럴듯한 대답을 하는 아이를 보면, 예전에 생활습관 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조르고 다 외우던 그 모습보다는 확실히 많이 성장한 것 같다.

나의 교육 철학대로 자유롭게 선택해서 스스로 몰입해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아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지금은 내가 농장도 정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지만, 아이의 이런 성장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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