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
루피시아의 "캐롤" 이다.
"캐롤"은 나에게 "다니엘"이란 영어이름을 지어주셨던
캐나다에 사시는 큰 외숙모님의 영어이름이다.
이제는 재작년이 되어버린 2024년
아이들과 밴쿠버에 놀러 갔을 때
본인의 이름과 같은 티라며 선물로 주셨다.
내가 새해 첫 글로 올린 "이름을 바꾸다"라는 글이
라이킷이 40이 넘었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일 일지 몰라도 내게는 처음 있는 일.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그래서 큰 외숙모 생각이 더 났고 그래서 마셨다.
마시고 나서 검색해 보니 캐롤은 크리스마스 시즌 티라고 한다.
2주 정도 늦었지만 그래도 내 기분만큼은 크리스마스로 하기로 했다.
한 살 더 안 먹고 좋지 뭐.
어쩐지 티캔에 고양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데코하고 있더라니.
지금은 포장이 바뀌었다.
상품설명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이
홍차에 딸기향, 바닐라 향을 첨가하고
코코넛 조각과 장미꽃잎이 들어갔다고 하더니
차를 따르자마자 상큼달콤한 딸기향과
부드러운 바닐라향이 치고 올라온다.
차가 목을 넘어갈 때
코코넛 향이 그 부드러움을 극대화한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포크로 한 움큼 찍어서 먹은 듯 한 느낌.
그래서 뜨거운 줄도 모르고 후루룩 마시다가
입천장 델 뻔.... 어후... 뜨거워...
새해가 밝았다.
사실 지난주에 밝긴 했다.
첫 목요일이 1월 1일이라서 글을 못 올렸다.
아이들이 방학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여유로워지는데 나는 바빠지는 마법.
시인 나태주 님은 말했다.
"한 해가 온다는 건
매일의 태양과 365개의 달님을
공짜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는 기적이다."
새해라는 기적을 선물 받았으니
기쁘다.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먼저 찾아온 새해의 태양이
내게 너무 큰 선물이 되어주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42살로 넘어가는 기점이 서글프지만
나보다 두 배를 더 살아보신 시인님이 기적이라고 하니
그것은 기적이 맞을 것이다.
원래 기적은 내가 기적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적이 되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차는
새해라서 새로 선물 받은 보름달 같다.
딸이 사춘기가 온 것 같다며
외동딸과의 관계가 고민이라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하는 지인에게
나와 딸이 겪은 일들과 우리가 느꼈던 좋은 방법들을 이야기하며
내 딴에는 위로라고 해준 적이 있었다.
내 딸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 지랄총량의 축복을 받아
아기일 때부터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감정으로
나를 흥분시키거나 슬프게 했고
11년간 내가 쌓아온 경험들로 나는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오히려 나이가 들며 조금씩 성숙해진 아이는 대화가 통했고,
더 잘 대하는 법을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더 대화를 나눠보니
그분도 나처럼 딸과 단 둘이 1박 2일 여행도 해봤고
딸과 대화로, 즐거운 활동으로 감정들을 풀어가려고 노력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원하고 있었고 절대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아... 창피해 정말...
위로랍시고 내 경험을 주저리 떠들던 게 무안하고 민망해졌다.
그 사람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을 텐데.
그 사람의 딸이 내 딸이 아닌데 말이다.
그 사람은 나의 얕은 경험과 지혜를 구한 게 아니다.
그냥 자신이 너무 답답하니까 속상하니까
털어놓고 싶었던 것이겠지.
이처럼 상대방의 경험이 나와 비슷한 적도 많고,
상대방의 처지가 나와 비슷한 적도 많았지만,
그 사람의 겪는 무게가 과연 내가 겪은 무게와 같을까?
나와 집안, 환경이 모두 같은 내 누나조차도
어떤 기억과 추억이 나와 정반대이거나,
전혀 다른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으로
세상을, 또 내가 짊어진 고통을 판단하고 느끼지 않을까.
똑같은 일도 다르게 느끼는데
똑같은 고민이 어디 있을 것이며,
똑같은 삶의 무게가 어디 있을까.
이기주 님은 [마음의 주인] (말글터, 2021)에서
"그 사람을 기다릴 수 없으면 위로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라고 했다
꼭 책처럼 극단적인 슬픔이나
절망의 수렁에 빠진 것뿐만 아니라
가벼운 고민과 마음의 고통에도 포함되는 말 같았다.
어떻게든 이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가 억지로 이겨내도록 해결해주는 것보다
스스로 이겨내고 추스를 수 있게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만 전해질 수 있게
다 이겨내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그게 진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인과의 그 짧은 만남시간 안에
어떻게든 해결해 주고,
이 사람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사람을 위로한다는 내 욕심을 채운 것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한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오늘만 아니라 다음에도 만날 수 있고
그 고민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하며
그 사람이 이겨내는 모습에 나도 행복했을 테니까.
다른 사람의 고민이 하찮거나 가벼이 느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의 무게가 가벼운 게 아니라
내 공감능력이 가벼운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도 알아. 다 해봤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잘난 척이다.
옷가게에 갔는데 점원이 졸졸 따라다니며
"이거 입어보세요," "그거보단 이게 어울려요." 하기보다,
"어서 오세요. 둘러보시고 궁금하시거나
도움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하고
카운터에 대기하는 그 자세.
어쩌면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위로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늘 눈앞에 두지만. 기다리는 사랑.
분명 내게 널 위한 생각이 있지만
일단 네 모든 말을 다 들어주는 사랑.
널 위로하기 위해 널 기다린다.
기다림 자체가 위로고 사랑이다.
"사랑은 인내입니다.
적절한 순간에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차분하고 온유하게 기다립니다.
사랑은 인내합니다."
파울로 코엘료 [최고의 선물] (북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