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토요일 오후였다. 그와 첫 등산을 하기로 하고 서울대입구역에서 만나 관악산 초입에 들어섰을 때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초행길이었지만 그는 관악산에 몇 번 와봤다는 말을 믿고 큰 문제없겠지 생각하고 출발했다. 약간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그냥 가보자고 하는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26세가 끝나가는 해 12월 초, 지인의 소개로 대학로 낙산가든 지하 ’라까브‘ 카페&레스토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날따라 날씨가 무척 춥기도 했고, 얘기가 잘 통하고 분위기도 좋아서인지 한 자리에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장장 4시간을 보냈다. 서울 한복판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고향도 같고 네 살 차이인데,가치관이 비슷하고,사고방식과 견해가 비슷해 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30세로 국내 대기업 P사에 다니고 있었고, 난 S 대학교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다.
시골집에서는 여동생도 있는데 얼른 결혼해야 한다고 성화를 대고 있었다. 난 아직 노처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동네 어린이집에서 돌봄 교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이 꽃다운 나이일 때 보내야 한다며, 아버지는 똥차가 안 나가면 합동결혼식이라도 시켜야 한다고 벼르고 있던 차였다.
3교대 근무로 데이트할 시간도 많지 않고, 뚜렷이 사귀는 사람이 없던 나를 눈여겨보던 간호기숙사 관리인 아주머니의 간곡한 소개로 그를 만난 것이다.
작은 키가 아닌 내가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그의 키가 좀 더 컸으므로 둘이 걸을 때 그림이 괜찮아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에 큰 코가 시원하게 자리하고 있어 서구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갸름한 편이어서 둥근 편인 내 얼굴을 어느 정도 보완해 줄 것 같은 상상으로 그 시점에서 2세 얼굴을 생각했다면 내가 너무 오버였을까? 그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데이트를 마치고 꽃집을 지나칠 때, 꽃이 참 예쁘다 했더니 꽃 좋아하느냐고 하며 겨울이라 장미 값이 꽤 비쌌는데도 기어코 장미 한 송이를 사주었고, 기숙사까지 바래다줬다.
관악산 중턱쯤 올랐을 때 눈은 제법 송이도 굵어지고 물기를 머금은 진눈깨비로 변해있었다. 운동화 차림에 겨울 파카를 입고 있어서 추운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를 뒤집어썼는데도 눈보라로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얼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변하여 점점 길도 묻혀버리고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여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만 내려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을 하니 그는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양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괜찮을 거라고 앞장서며 오르막길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점점 올라갈수록 눈발은 더 거세어지고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내려가기도 난감하고 올라가기도 겁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산속에서 미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엄습해 왔다. 안전하기로는 그래도 내려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왠지 잠시 이 사람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이런 난관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고 헤쳐나갈 것인가, 앞으로 험난한 인생길에 많은 고비가 따를 수도 있을 텐데, 그걸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어떡하죠? “라고 초조하게 물으니 그는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을 내서 가보자고 격려한다.’ 그래 가는 데까지 가보자. 우리 인생 여정에 이보다 더 힘든 일들이 부지기수로 생길 수도 있는데 이깟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건 약한 사람의 행동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정말 정상이 나왔고,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는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이미 하산할 사람은 다 내려가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도대체 길이 보이질 않았다. 몇 번 와봤다는 그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쪽으로 가야 하나 저쪽으로 내려가야 하나 왔다 갔다 하며 잠시 헤매고 있는데, 마침 천사처럼 안갯속 같은 눈 속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삼막사 쪽으로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눈이 오는데 어떻게 내려가려고 여기까지 올라왔냐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며 잠시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 길로 곧장 내려가면 된다고 일러주고 그 남자는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휴~! 그제야 그도 이젠 알 것 같다고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언 몸을 꼭 안아줬다. 내심 걱정은 많이 했으나 정상을 향한 굳은 결심과 의지, 이처럼 진취적이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가는 순간이었다.
눈발은 서서히 약해지더니 안양 쪽으로 내려오니 거의 그쳤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는 더 빠른 듯했고, 수월하게 산을 내려왔다. 곧 인가도 보이고 찻집이며 사우나라는 간판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우리 진눈깨비를 맞아 옷도 젖고 추운데 사우나를 하고 갈까요? “ 하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들짝 놀라며 무슨 소리냐고 그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서 옷도 좀 말리고 따뜻한 것도 마시자고 말했다.사우나라는 소리가 그땐 왜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졌던지…,
근처 카페로 들어가니 난롯가에서 불을 쬐며 고구마를 먹던 주인 여자와 직원인 듯한 아가씨가 자리를 비켜주며 옷을 말리라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커피를 시켰는데 따뜻한 군고구마까지 서비스로 줘서 맛있게 먹으며 옷을 말렸다.
대학로 동숭동까지 다시 가서 저녁을 먹고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귀가하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듬직해 보였다.
그다음 해, 장미의 계절인 유월에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양가 친척들과 지인들의 따뜻한 박수와 축복 속에서혼배성사를 올렸다.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백년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