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한승 Aug 29. 2024

[소설쓰기 #2] 북한산 괴물과 돌림노래


[소설쓰기 #1]에 이어서... 



#2


내 이름은 정은주. 우진에게는 내 이름을 불려본 적 없다. 우진은 항상 나를 선배라고만 불렀다. 스물네 살 때 대학 전공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우진은 안 본 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입는 옷이 그랬다. 대학생답지 않게 카라 달린 셔츠에 구김 없는 바지만 입던 우진이 더 이상 아니었다. 여기서 만난 우진은 펑퍼짐한 단색 반팔 티셔츠에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한결 편해 보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는데, 그건 우진의 눈빛도 어딘가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진의 내려다보는 눈빛. 우진은 대화할 때 턱을 아주 살짝 치켜들고 눈을 내리까는 버릇이 생겼다. 그건 상대방을 조금 긴장하게 했다. 잘생긴 입으로 사려 깊고 다정한 말투를 건네는 우진의 서늘한 눈빛. 다시 만난 우진은 세상 물정 알아버린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성인판 같았다.


우리가 같이 다니는 디자이너 수업 주말반에는 이십 대 후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들과 떨어져 앉았고 우진도 그랬다. 수업 첫날 교실에 들어오다가 뒷자리에 앉은 내 얼굴을 발견한 우진은 검은색 백팩을 의자에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정우진!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에 우진은 웃었다.


"선배, 여기서 뭐 하세요."


뭐 하긴 뭐 해. 이직 준비하지. 우진보다 두 살 많은 나는 막 서른에 들어선 나이였고 사 년 차 구청 공무원이었다. 같이 고시를 준비하던 친구들은 구청의 큰 건물에서 일하게 된 것을 부러워했다. 나는 매일 여덟 시 반까지 사무실에 출근했다. 보건정책과 팻말이 걸려 있는 바로 밑 자리가 내 자리였다. 운이 좋게도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 직무는 아니었다. 나는 주민센터에서 올라오는 여러 현황표들을 취합해 상위 기관에 보고하는 일을 했다. 야근이 잦았으나 업무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대인 관계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육 개월 전부터 퇴사를 결심하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건 다른 이유였다.


어느 날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손에 잡혔다. 낙타를 닮은 동료를 놀려줄 요량으로 컴퓨터 그림판에 낙서를 끄적인 게 시작이었는데, 몇 주가 지나자 나는 그림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 내가 낙서 같은 그림에 자주 입혔던 색은 파란색. 파란색 바다. 파란색 하늘. 파란색 자전거. 파란색 사람 같은 그림이 자꾸만 공책에 늘어갔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남자친구와 언제 결혼할 거냐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 같이 매운 김치찜 정식으로 메뉴를 통일했을 때, 은주 씨는 집도 잘 살고 얼굴도 예뻐서 별 걱정 없겠다는 칭찬을 옆 부서 주무관님한테 들었을 때. 그때마다 밤늦은 시간 속 내 공책에는 짙은 파란색 물감이 들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그리는 그림을 곧잘 좋아했는데, 그중에 남자친구는 없었다. 이미 실종된 지 반년 째였으니까. 김선오는 베트남 여행을 떠났다가 돌연 사라졌다. 사람이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귀국 이틀을 앞두고 연락이 닿지 않기 시작한 선오는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범죄에 연루된 것도, 교통사고도, 실족사도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만 있었다. 베트남에 사는 선오의 친구라던 남자가 처음 전화로 그 소식을 들려줬다. 휴대폰 너머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불규칙적으로 가끔씩 멀어졌는데, 통화와 동시에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그의 뿌연 한숨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선오의 얼굴이 연기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시원 일 층 입구 앞에서 담배를 문 채 나를 쳐다보던 선오의 얼굴.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구매한 담배는 매콤하고 씁쓸한 맛이 났다.


다음날 구청으로 출근한 나는 남자친구와 계획했던 여름휴가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말했고, 다시 계획이 설 때까지 휴가는 미루겠다고 했다. 아무도 말을 덧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일주일 뒤, 나는 파란색 물감을 샀다. 디자이너를 육성한다는 학원을 등록했고 우진을 마주쳤다. 




"대전에서 이상한 계곡을 봤어요. 대전에도 계곡이 있다는 거 알았어요, 선배?"

주말을 지내고 온 우진의 얼굴은 살짝 그을려 있었다. 나름대로 어울렸다. 나처럼 햇빛에 쉽게 그을리는 피부인지, 아니면 여자친구와 지나치게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처음엔 가볍게 등산이나 하려고 시작했어요⋯⋯. 여자친구도 좋아하거든요, 등산.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언덕은 안 나오고 우거진 나무만 많아지는 거예요. 근데 뭐, 덕분에 그늘도 지겠다 무작정 걸어가는데 조금 더 가니까 거기에 물길이 있었어요. 생각보다 넓은 물길."

우진은 말을 멈추고는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다. 삼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넓이의 계곡물에 나뭇잎 그림자와 햇빛이 온통 섞여 있었다. 아직 여름 같은 풍경이 담긴 푸릇한 사진이었다.

"물길 따라 나 있는 산길을 멍하니 따라가다가 작은 동굴 같은 걸 봤어요. 신기하죠. 선배 얘기랑 똑같잖아요. 북한산 밑에⋯⋯. 무슨 계곡이랬죠?"

"장이동 계곡."

"맞아요, 장이동 계곡. 그래서 여자친구랑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고 한 손에 스타벅스 테이크아웃컵을 든 강사가 들어왔다. 자, 안녕하세요. 모두 포토샵 열어주시고. 날이 많이 서늘해졌네요. 마이크만 연결하고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우진은 내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세워 앞을 바라봤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소설쓰기 #1] 북한산 괴물과 돌림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