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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커피잔

by 고요한동산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모두 행복해져라》라는 노래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언제부터인가 업무 시작 전에 틀기 시작한 이 노래는 자연스럽게 근무를 알리는 노동요가 되었다.


모두 행복해져라
모두 이루어져라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 다
하는 일 모두 큰 탈 없이
모두 행복해져라
모두 다 이루어져라
나를 믿는 사람들 모두 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


처음에는 정말 행복해지는 것 같았고 모두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노동요가 되고 나니 이 노래가 한없이 쓸쓸하게 들렸다.

노동요를 들은 귀가 뇌에게 신호를 보내면 엎드려 있던 몸이 벌떡 일어났다. 파블로프의 개가 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듯, 똑바로 앉아 마우스를 잡고 눈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의지와 다르게 재빠르고 신속한 업무를 위해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움직여 정보를 흡수했다. 정보를 흡수한 뇌에게 재촉당한 손가락이 단축키를 누르며 속도를 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일을 했다.


부스럭거림과 컵 씻는 소리, 일일 업무 보고의 메신저 알람이 퇴근 시간을 알려주었다.

'《모두 행복해져라》 노래를 퇴근 송으로 틀어줬다면 행복한 마음으로 퇴근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퇴근 처리를 하고 컴퓨터를 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피로가 쌓인 축 처진 어깨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신선한 공기 대신 폐에 먼지가 가득 찬 것처럼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내가 공장에 돌아가는 기계 부속품 중 하나인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에 다른 게 좀 있었을까.

오래전부터 있던 바닥의 균열이 다른 방향으로 조금은 움직였을까. 흔하디 흔한 일상에 다른 색깔이 있었을까 오늘의 시간을 되돌려보았다.


아침 출근길, 8시 5분에서 15분 사이 단골 카페의 키오스크 앞에 섰다. 늘 그랬듯 카페라떼 메뉴를 선택하고 핸드폰을 대고 결제를 했다.


"주문하신 아이스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달콤한 미소의 사랑스러운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아닌 저음의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또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었나?' 생각하며 라떼를 받아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에는 1년 동안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이 거쳐갔다.

처음 만난 아르바이트생은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힘차게 인사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 깨어나지 못했던 뇌에 산소가 주입된 것처럼 번뜩 정신을 차리곤 했다. 그는 단 두 문장으로 하루를 생동감으로 바꿔주었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텐션을 끌어올린 밝고 우렁찬 음성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키가 큰 씩씩한 청년은 자신과 닮은 키 큰 하늘색 머그컵에 커피를 내어주곤 했다. 그러면 내 마음도 맑은 하늘처럼 환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오니 씩씩한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람이 인사를 했다.

에너지 넘치던 그의 목소리를 이제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두 번째 아르바이트생의 미소는 달콤했고 목소리는 상냥했다. 카페를 들어서면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어서 오세요'하며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는 하루의 시작을 포근하게 여는 주문 같았다. 그녀는 주문한 커피를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핑크색 잔에 담아주었다. 부드러운 실루엣의 커피 잔처럼 날이 서있던 마음도 조금씩 둥글둥글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두 아르바이트생 대신 커피를 내어준 사람은 카페 사장님이었다. 그는 적당한 길이의 투명한 잔에 라떼를 담아 주었다. 먼지 쌓인 조화들을 다 걷어내고 묵혀두었던 얼룩을 닦아낸 카페는 내어 준 투명한 커피잔처럼 깨끗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온전히 보이는 커피를 바라보며 '우유와 섞인 커피색이 참 오묘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담긴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투명한 시선을 갖게 된 것만 같았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과 내어준 커피잔이 닮아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행한 일들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소소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행동들은 잔에 담겨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매 순간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도장을 찍으며 의지를 반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기계부속품에 불과한 게 아니라, 하나하나 의미 있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집에 돌아와 뇌를 깨우기 위해 오늘의 두 번째 커피를 내렸다. 어떤 잔을 선택할까 신중하게 살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 머그잔을 머신에 놓고 추출 버튼을 눌렀다.

커피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선택한 하얀색 잔이 오늘 하루를 깨끗하게 마무리 짓는 느낌이 들었다.


선택된 모든 순간들이 내 삶을 이끌었다.

흘러가듯 지나가는 삶 같지만 그 순간을 멈춰보면 의미 없지 않은 순간이 없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이 되듯이 그렇게 내 삶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양한 커피잔을 늘어놓고 '오늘은 어떤 잔을 선택할까' 고민하는 일이 사뭇 즐겁게 느껴졌다.


하얀 머그잔에 입술을 대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음미해 보았다. 오늘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이 쌓여서 하루를 이룬다. 같은 커피지만 다른 잔에 담을 수 있듯 내 삶도 선택에 따라 다양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내일은 어떤 일상을 만나게 될까 슬며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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